욕조에 치과의사 모녀 시체가…내연남에 격분? 남편 사형→무죄[뉴스속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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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6.12. 오전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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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루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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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아파트 화재 모습.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95년 6월12일 오전 8시40분쯤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흰 연기가 새어 나왔다. 경비원은 해당 세대에 인터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재를 의심한 경비원이 119에 신고했다. 연기의 원인은 안방 장롱에서 시작된 화재였다.

출동한 소방관은 10여분 만에 불을 껐다. 현장을 수습하다 들어간 욕실 안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30대 초반의 여성과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된 것. 치과의사 엄마인 최모씨와 한 살배기 딸의 사체였다. 이때 남편인 외과의사 이모씨는 개인 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어서 외출한 상태였다.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은 초동 수사 실패로 미궁에 빠져버린 사건으로 28년이 지난 현재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용의자가 오전 7시 출근한 남편?


경찰과 검찰의 조사 자료에 기록된 사건 관련 정황을 보면, 최씨 모녀는 목이 졸린 듯한 자국이 있는 상태로 물이 담긴 욕조에 떠 있었다. 최씨가 입고 있던 흰색 반소매 티셔츠는 벗겨져 있었다. 팬티는 무릎 근처까지 내려진 상태였다. 벗겨진 티셔츠와 최씨의 입술, 손톱 사이에서는 소량의 핏자국도 발견됐다.

화재는 안방 장롱 속 옷가지에서 처음 발화한 것으로 추정됐다. 최씨의 가방에 있던 현금과 수표 51만8000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경찰은 최씨의 남편인 외과의사 이씨를 용의선상에 올렸다. 수사 과정에서 최씨에게 내연남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씨가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에 격분해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고 의심한 것.

또 이씨가 사건 발생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아내와 딸의 시신을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놓은 욕조에 유기했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른 뒤 오전 7시 출근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다만 경찰은 범행을 입증할 만한 지문이나 범행도구 같은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서 욕조 속의 물 온도를 손가락으로만 측정해놓고 열흘 후 온도를 측정했다며 기록을 제출하거나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지 않는 등 초동 수사에 미흡했다.

송치 이후 검찰은 기소 전까지 3개월 가까이 각종 법의학적 지식과 컴퓨터 화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등 첨단장비를 동원했으나 사실상 직접적인 물적 증거를 찾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정황 증거를 들어 이씨를 지목했다. 검찰은 1995년 9월26일 이씨를 구속기소했다.


사망과 화재, 오전 7시 전이냐 후냐…'시간' 미스터리


이씨 측 변호인은 스위스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처 교수를 국내 법정에 세웠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화면
1996년 2월24일 당시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에서 진행된 1심 재판에서 이씨는 유죄를 판결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이 팽팽히 맞선 부분은 사망 추정 시간과 화재 발생 시간의 정확성 여부였다.

검찰 측 주장은 이씨가 사건 당일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오전 7시 출근 직전 장롱에 불을 질렀다는 것. 시체의 굳은 정도(시강)나 시체에 생기는 반점(시반)으로써 사망 시간이 오전 7시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국내 법의학자들의 소견을 근거로 들었다.

또 검찰은 "이씨가 출근한 뒤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불이 서서히 붙는 밀폐된 공간인 장롱 속에 불을 냈다"며 '지연 화재'를 주장했다. 밀폐된 방안의 장롱 속 옷가지에 불을 붙이면 밖에서 연기가 발견될 때까지 2시간 이상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이씨 측 변호인은 스위스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토마스 크롬페처 교수를 국내 법정에 세웠다. 그는 "시반과 시강으로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것은 오차 범위가 넓다. 시신이 뜨거운 물에 잠겨있을 경우 강직 현상이 일찍 올 수 있다"며 "사망 시간이 오전 7시 이후일 가능성이 있다"고 증언했다.

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발화 시간을 재연한 검찰 측과는 달리 1800만원을 들여 실제 아파트 모형을 만들어놓고 화재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불을 낸 지 5∼6분 뒤에 밖에서 연기가 보이는 것을 증명해냈다. 그렇다면 오전 7시 이씨가 집을 나간 뒤에 제삼자가 불을 질렀다는 얘기가 되는 것.


'사형→무죄→유죄→무죄'…8년의 재판


/사진=이지혜 디자인기자
7년8개월의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최종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앞서 1심은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2심은 무죄, 대법원은 다시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서울고등법원은 다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유죄를 인정할 직접증거가 없고,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사망 시각 역시 분명치 않다"며 "나머지 간접증거를 모두 종합해봐도 유죄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씨 측 변호인을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당시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확인된 것"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형제와 법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이 사건은 28년째 미제 사건이자 과학수사 실패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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