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구하라씨 협박’ 최종범 댓글 소송에 법원 “범죄 비판 용인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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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3.18. 오전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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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최종범씨가 2018년 9월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고 구하라씨의 사생활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을 확정받은 구씨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씨가 댓글 작성자들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법원이 최씨 청구의 일부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기각했다. 댓글에 과도하게 법적 책임을 지우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고, 범죄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용인돼야 한다는 취지가 판결에 담겼다.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3단독 신종열 판사는 최씨가 댓글 작성자 6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5명에 대한 청구를 기각하고, 1명만 최씨에게 3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최씨는 자신과 관련된 언론기사의 포털사이트 댓글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면서 댓글 작성자들이 각 300만~4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소송을 냈다.

▶관련기사: [단독]구속된 ‘고 구하라씨 협박’ 최종범, 댓글 작성자들에 민·형사 소송 다 걸었다

이번 판결에서 청구 기각된 5명이 작성한 댓글은 “파렴치한 놈 맞으면서 뭘 자꾸 아니래. 이런 놈들한테는 3년도 짧다”, “저런 XX들 솔까 무기징역 내려져야됨; 지금 데이트폭력으로 3일에 1명씩 죽는데 남자XX들 처벌 똑바로 하는 게 유일하게 데이트폭력 막는 방법임”, “넌 쓰레기야” 등이다.

신 판사는 범죄를 다룬 언론기사의 포털사이트 댓글란에 독자가 댓글로 의견을 표명한 행위가 형법상 모욕죄나 민사상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는 신중해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자칫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 판사는 “언론보도 관련 게시판에서의 표현행위에 대한 과도한 법적 개입은 사회 구성원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게시판의 긍정적 역할과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했다. 신 판사는 이어 “범죄나 사회적 일탈행위에는 법적 책임 이외에 여론 등을 통한 사회적 비판이나 비난 형태의 책임 추궁이 수반될 수 있다”며 “그러한 비판이나 비난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로써 용인돼야 한다”고 했다.

가수 고(故) 구하라의 영정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신 판사는 또 이른바 ‘바른말·고운말’만으로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온라인 공간에서의 표현은 강제적 규율이 아니라 가급적 이용자의 자율적 규제에 맡겨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욕설 사용과 같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부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행태 전반을 범죄화하거나 불법행위화해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방식은 사회상규나 윤리·도덕의 범주에 대한 법의 과도한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무례한 언사나 욕설이 댓글에 포함돼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행위라고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되고 표현의 경위나 내용·형식, 댓글 작성자와 상대방과의 관계, 언론보도와 표현의 관련성 정도를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신 판사는 5명의 댓글은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해자인 구씨가 유명 연예인이고, 최씨 범행이 디지털 성폭력의 일환으로 큰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사안이라는 점을 감안했다. 이어 댓글 내용이 처벌수위나 범죄 예방방안에 관한 것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신 판사는 “댓글에 욕설이나 비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단어가 포함돼 있으나, 그 표현수위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나 감정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다소 거친 표현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돼지 XX야. 죄는 죄고. 일단 살 좀 빼라. 어휴 비계덩어리 XX”라는 댓글에 관해서는 언론기사 내용과 상관없이 최씨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최씨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위법한 행위라고 신 판사는 평가했다.

그동안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와 피해자를 지지하는 연대자 또는 제3자를 상대로 명예훼손·모욕이라며 민·형사상 법적 조치를 하는 것은 2차 가해뿐 아니라 ‘피해 말하기’에 대한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로 지적돼 왔다.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 이후 성폭력 가해자들의 법적 조치가 점차 규모를 키우거나 기획소송으로 흘러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는 사회 분위기에 역행한다는 분석도 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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