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J에 200만원 뿌려대던 그놈, 돈 떨어지자 칼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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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3.13. 오후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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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시간 이상 BJ들과 채팅, 10만~200만원 사이버 머니 뿌려대
5500만원 대출, 월세 밀려 화물차서 생활하며 범행 대상 물색
30대 피해 여성, 자격증 7개·편의점 알바하며 가족 부양
법원 “죄질이 극히 나쁘다” 1·2심서 무기징역 선고

제주경찰이 제주시 민속오일시장 인근 농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해 8월30일 오후 6시50분쯤 제주시 오일시장 주차장과 이어진 한적한 농로. 인근 편의점에서 일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김모(당시 39세)씨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낯선 남자가 도로변에 주차된 화물차에서 내려 쫓아온 것이다.

남성과 맞닥뜨린 김씨는 들고 있던 우산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인근 콩밭에 쓰러졌다. 이 남성은 김씨 휴대전화 케이스에 있던 1만원권 지폐 1장을 가지고 달아났다. 김씨는 다음날 정오쯤 싸늘한 주검으로 마을 주민에게 발견됐다.

제주서부경찰서는 사건 발생 하루 뒤인 지난해 8월31 오후 10시 48분쯤 강모(29)씨를 서귀포시 표선면의 한 주차장에서 긴급 체포했다. 강씨 차량에선 범행 때 사용한 흉기가 발견됐다. 숨진 김씨의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케이스도 나왔다. 강씨는 지난 10일 열린 2심 재판에서 강도 살인과 시신 은닉 미수 등 혐의로 1심에 이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제주지검으로 이송되는 제주 민속오일장 살인사건 피의자/연합뉴스

미리 흉기 준비하고 범행 대상 물색한 ‘계획범죄’

경찰에 체포된 강씨는 “생활고 때문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미리 흉기를 준비하고, 사건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하는 등 단순 강도 살인으로 보기에는 강씨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판단했다. 계획적인 범죄라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강씨는 지난해 8월28일 자신이 살고 있던 원룸 월세가 밀리자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자신이 소유한 화물차에서 숙식하며 3일간 범행 대상을 물색한 것으로 확인됐다. 주로 인적이 드문 공원과 장이 서지 않는 오일장터 주변이었다.

A씨는 지난해 8월 31일 오후 6시40분쯤 걸어가는 피해자를 발견하고 차량으로 피해자를 앞서간 뒤 한적한 농로 옆에 화물차를 세워 기다렸다. 피해자가 차량 옆을 지나가자 흉기를 들고 쫓아갔다. 강씨는 “가진 돈을 내놓아라” 협박했고, 피해자가 들고 있던 우산으로 휘두르며 저항하자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강씨는 범행 5시간 뒤인 지난해 8월 31일 0시 17분쯤 다시 현장을 찾아가 김씨가 사망했는지 확인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김씨가 숨진 것을 확인한 강씨는 사건 은폐를 시도했다. 시신을 5m가량 끌어 풀숲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김씨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을 듣고 급히 달아났다. 이때 피해자의 휴대전화와 휴대전화 케이스에 있던 체크카드를 챙겼다. 강씨는 사건 현장에서 3km가량 떨어진 제주시 외도동 앞바다에 피해자 휴대전화를 버렸다. 훔친 카드를 들고 편의점과 마트 2곳에 들러 태연하게 닭다리와 우유, 야식 거리 등 6만9500원어치를 구입했다.

재판 과정에서 강씨는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가방에 돈이 있는 줄 알고 훔치려 했고, 위협하다가 놀라 찌르게 됐다”며 “살해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생명 존중에 대한 인식 없이 오직 돈만을 노리는 심리 상태로, 검거되지 않았다면 추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생계유지 때문이 아니라 미리 계획한 흉악한 범죄로 보고 있으며, 이는 특정 강력범죄에 해당해 가중 처벌 대상”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일인 지난해 8월 30일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한 A씨가 본인 소유 탑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영상 캡처 화면./제주지방경찰청

한 맺힌 피해자 아버지 “자격증 7개, 편의점 알바로 가족 부양하던 착한 딸”

이 사건이 벌어진 뒤 피해자의 아버지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글을 올렸다. 그는 “딸이 요양 보호자 자격증과 간호조무사 자격증 등 7개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착실하고 근면 성실했다”고 적었다. 이어 “딸이 편의점을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129만원이라는 월급을 받았다”며 “코로나로 일이 끊긴 아버지에게 딸이 생계비를 지원해주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딸이 매일 5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운동을 겸해서 걷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교통비를 아껴 저축하기 위해 매일 1시간 30분 거리를 걸어 다닌 것을 사건 후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막노동만 해도 하루 일당으로 일주일은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착하게만 살아온 제 딸을 뒤따라가 흉기로 살해했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한이 맺혀서 잠을 잘 수 없다”고 글을 맺었다.

BJ 환심 사려 한 번에 수백만원 선물하는 ‘큰 손’

경찰 수사 결과, 강씨는 평소 여성 BJ(인터넷 방송 진행자)에게 사이버 머니를 후원하며 돈을 탕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12월부터 8개월 동안 매일 10시간 넘게 여성 BJ 여러 명과 온라인 공간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BJ들에게 적게는 10만원, 많게는 200만원 상당의 사이버 머니를 선물했다. 범행 당시 강씨는 차량 구입과 생활비, BJ들에게 보낼 사이버 머니를 마련하기 위해 5500만원을 대출한 상태였다.

경찰 관계자는 “범인이 현실에서는 무일푼 청년이었을지 몰라도, 가상 세계에서는 고액 후원자로 ‘큰손’ 행세를 해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서울로 찾아가 한 BJ를 실제로 만나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BJ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한 강씨는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월세가 밀리자 범행 2일 전 집주인 몰래 도망쳐 본인의 화물차에서 숙식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조사에서 강씨는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택배 배송 일을 했는데, 생각보다 돈이 안 됐다. 일을 그만두고 직업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BJ에게 빠져 돈을 탕진한 강씨가 자신 명의의 차를 가지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생활고가 아닌 당장 돈이 필요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

항소심 재판에서 강씨 변호인은 “BJ 후원으로 돈을 탕진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언론 보도는 과장됐다”며 “범죄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묻지 마 범죄는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강도 살인죄는 반인륜적인 범죄로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으며, 죄질이 극히 나쁘다”며 “당시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피해자 유족은 피고인의 엄벌을 탄원하고 있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오재용 기자 island1950@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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