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랑 같은 번호판이?’…20분이면 뚝딱, 처벌은 미미

입력 2023.04.20 (15:16) 수정 2023.04.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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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날아온 과태료 고지서 한 장. 간 적도 없는 곳에서 과속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사진 속에 있는 건 내 차량과 똑같은 번호판을 단 다른 차량.

똑같은 번호의, 다른 차량이 위반해 부과된 과태료 고지서.똑같은 번호의, 다른 차량이 위반해 부과된 과태료 고지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 똑같은 번호판, 다른 차량

이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은 대구에 살고 있는 김승범 씨입니다.

처음으로 고지서가 날아온 건 지난해 12월. 전북 김제시에서 오전 6시 50분쯤 제한속도 60㎞를 11㎞ 초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고지서를 받아본 김 씨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라도를 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카메라에 찍힌 건 동일한 번호판을 부착한 검은색 모하비 차량. 현재 김 씨가 8년째 몰고 있는 분홍색 스파크 차량과 완전히 다른 차종이었습니다.

과태료 고지서에는 검은색 SUV가 찍혀있다.과태료 고지서에는 검은색 SUV가 찍혀있다.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올해 1월에는 한국도로공사로부터 고속도로 통행료를 미납했다는 납부고지서까지 날아온 겁니다. 번호판을 도용한 차량의 행동은 점차 대담해져, 3월부터는 무려 11차례에 걸쳐 고속도로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과태료 속도 위반 고지서를 곧바로 경찰에 제출했습니다. 경찰 측에선 모하비 차량을 번호를 도용한 불법 차량으로 보고 김 씨의 과태료를 감면해줬습니다.

■ 피해자인 제가 번호를 바꿔야 한다고요?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 씨가 번호판 도용 차량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자 경찰이 뜻밖의 답변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바로 김 씨가 차량 번호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량수배의 경우 전국 단위로만 가능해 김 씨의 차량까지 수배 대상이 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차량 번호판을 바꾸면 불법 차량만 수배 대상이 돼 수사가 더 쉽다는 게 경찰 측의 설명입니다.

대구경찰청 전경.대구경찰청 전경.
김 씨는 피해자가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라고 토로합니다. 차량 번호판을 직접 교체할 경우 행정적인 처리와 비용 모두 김 씨가 부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취재진이 이에 대해 경찰에 답변을 요구하자 경찰 관계자는 이런 답변을 내놨습니다.

경찰 관계자
"차량 번호판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른 수사 방법이라 그렇게 권유했습니다. CCTV로 추적하는 수사의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지역도 전북이어서 쉽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 그래도 민원인이 원한다면 아날로그적인 수사 방법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40만 원에 당일 제작, 수도권은 퀵 지방은 택배'

생각보다 번호판 위조는 손쉬웠습니다.

취재진이 찾은 곳은 온라인 위조 업체. SNS를 통해 업체 몇 곳에 번호판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습니다.

직접 번호판 제작을 의뢰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위조 업체와 실제 나눈 대화 내용.위조 업체와 실제 나눈 대화 내용.
'종이'를 활용한 가짜 번호판도 심심치 않게 적발됩니다.
실제로 취재진이 종이 번호판 제작을 의뢰했더니 20분 만에 도안이 완성됐습니다. 재질도 원하는 대로 출력이 가능했습니다. 제작비는 번호판 2개를 제작하는데 2만 원. 번호판 1개에 만 원 꼴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종이 번호판을 실제 번호판에 대보면 크기부터 글씨체까지 거의 동일합니다.

종이로 제작한 '가짜 번호판'은 실제 번호판과 비교해도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종이로 제작한 '가짜 번호판'은 실제 번호판과 비교해도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 중범죄라면서 처벌은 '솜방망이'

차량 번호판 위조는 자동차 관련 불법 행위 가운데 처벌 수위가 가장 높습니다. 범죄에 악용되는 등 피해의 여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관리법에서는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처벌 수위는 미미합니다.

지난해 12월 대구에선 차량 과태료 미납으로 번호판이 영치되자 번호판을 달고 다닌 60대 남성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벌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에 그쳤습니다. 가짜 번호판이 적발되자 체납된 과태료를 모두 부과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앞서 울산에서는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시 종이 번호판을 부착한 40대 남성에게 징역 8개월 형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동종 범행을 두 번이나 저질렀는데도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친 겁니다.

■ 실태 파악도 못한 '국토부'

관할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KBS가 몇 차례 보도한 '쌍둥이 번호판'에 대해 번호판 제작소 등에 대한 관리 강화 방안을 내놨지만, 위조 번호판에 대해선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 번호판 위조는 중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국토부에선 통계조차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다만 국토부가 매년 실시하는 불법 자동차 단속 항목에서 무등록 자동차에 일부 집계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취재진의 취재가 시작되고 나서야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번호판 위조에 대한 단속을 고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달 실시되는 불법 자동차 집중 단속에서 경찰의 협조를 받아 위조 번호판에 대한 단속 항목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번호판 위조는 사례가 많지 않고, 단속이 힘들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국토부 관계자
"위조 번호판을 부착한 차량의 경우 운행되는 차량을 일일이 조회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하지만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선 다음 달 집중 단속에서 경찰과 협의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술한 단속에 솜방망이 처벌까지, 차량 번호판 위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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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차랑 같은 번호판이?’…20분이면 뚝딱, 처벌은 미미
    • 입력 2023-04-20 15:16:30
    • 수정2023-04-20 15:17:30
    취재K
어느 날 날아온 과태료 고지서 한 장. 간 적도 없는 곳에서 과속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사진 속에 있는 건 내 차량과 똑같은 번호판을 단 다른 차량.

똑같은 번호의, 다른 차량이 위반해 부과된 과태료 고지서.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 똑같은 번호판, 다른 차량

이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은 대구에 살고 있는 김승범 씨입니다.

처음으로 고지서가 날아온 건 지난해 12월. 전북 김제시에서 오전 6시 50분쯤 제한속도 60㎞를 11㎞ 초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고지서를 받아본 김 씨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라도를 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카메라에 찍힌 건 동일한 번호판을 부착한 검은색 모하비 차량. 현재 김 씨가 8년째 몰고 있는 분홍색 스파크 차량과 완전히 다른 차종이었습니다.

과태료 고지서에는 검은색 SUV가 찍혀있다.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올해 1월에는 한국도로공사로부터 고속도로 통행료를 미납했다는 납부고지서까지 날아온 겁니다. 번호판을 도용한 차량의 행동은 점차 대담해져, 3월부터는 무려 11차례에 걸쳐 고속도로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과태료 속도 위반 고지서를 곧바로 경찰에 제출했습니다. 경찰 측에선 모하비 차량을 번호를 도용한 불법 차량으로 보고 김 씨의 과태료를 감면해줬습니다.

■ 피해자인 제가 번호를 바꿔야 한다고요?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김 씨가 번호판 도용 차량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자 경찰이 뜻밖의 답변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바로 김 씨가 차량 번호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량수배의 경우 전국 단위로만 가능해 김 씨의 차량까지 수배 대상이 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차량 번호판을 바꾸면 불법 차량만 수배 대상이 돼 수사가 더 쉽다는 게 경찰 측의 설명입니다.

대구경찰청 전경.김 씨는 피해자가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라고 토로합니다. 차량 번호판을 직접 교체할 경우 행정적인 처리와 비용 모두 김 씨가 부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취재진이 이에 대해 경찰에 답변을 요구하자 경찰 관계자는 이런 답변을 내놨습니다.

경찰 관계자
"차량 번호판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른 수사 방법이라 그렇게 권유했습니다. CCTV로 추적하는 수사의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지역도 전북이어서 쉽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 그래도 민원인이 원한다면 아날로그적인 수사 방법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 '40만 원에 당일 제작, 수도권은 퀵 지방은 택배'

생각보다 번호판 위조는 손쉬웠습니다.

취재진이 찾은 곳은 온라인 위조 업체. SNS를 통해 업체 몇 곳에 번호판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하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습니다.

직접 번호판 제작을 의뢰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위조 업체와 실제 나눈 대화 내용.'종이'를 활용한 가짜 번호판도 심심치 않게 적발됩니다.
실제로 취재진이 종이 번호판 제작을 의뢰했더니 20분 만에 도안이 완성됐습니다. 재질도 원하는 대로 출력이 가능했습니다. 제작비는 번호판 2개를 제작하는데 2만 원. 번호판 1개에 만 원 꼴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종이 번호판을 실제 번호판에 대보면 크기부터 글씨체까지 거의 동일합니다.

종이로 제작한 '가짜 번호판'은 실제 번호판과 비교해도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 중범죄라면서 처벌은 '솜방망이'

차량 번호판 위조는 자동차 관련 불법 행위 가운데 처벌 수위가 가장 높습니다. 범죄에 악용되는 등 피해의 여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관리법에서는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처벌 수위는 미미합니다.

지난해 12월 대구에선 차량 과태료 미납으로 번호판이 영치되자 번호판을 달고 다닌 60대 남성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벌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에 그쳤습니다. 가짜 번호판이 적발되자 체납된 과태료를 모두 부과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앞서 울산에서는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시 종이 번호판을 부착한 40대 남성에게 징역 8개월 형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동종 범행을 두 번이나 저질렀는데도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친 겁니다.

■ 실태 파악도 못한 '국토부'

관할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KBS가 몇 차례 보도한 '쌍둥이 번호판'에 대해 번호판 제작소 등에 대한 관리 강화 방안을 내놨지만, 위조 번호판에 대해선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 번호판 위조는 중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국토부에선 통계조차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다만 국토부가 매년 실시하는 불법 자동차 단속 항목에서 무등록 자동차에 일부 집계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취재진의 취재가 시작되고 나서야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번호판 위조에 대한 단속을 고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달 실시되는 불법 자동차 집중 단속에서 경찰의 협조를 받아 위조 번호판에 대한 단속 항목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번호판 위조는 사례가 많지 않고, 단속이 힘들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입니다.

국토부 관계자
"위조 번호판을 부착한 차량의 경우 운행되는 차량을 일일이 조회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하지만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선 다음 달 집중 단속에서 경찰과 협의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술한 단속에 솜방망이 처벌까지, 차량 번호판 위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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