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국대사관 직원이었던 A씨는 2016년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 사이트에 해외 대사관 소속 고위 외교관들의 비위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여기에는 특정 외교관을 ‘Y’로 지칭하며 그가 여직원을 성추행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2년 후 A씨는 Y 외교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04년 여기자를 성추행했던 Y.” 1심 재판부는 이 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Y외교관이 술집에서 여기자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었고, 이로 인해 품위손상을 이유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적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소문이 존재하는 정도인데 Y외교관을 상습적으로 여성을 성추행하거나 성희롱하는 사람으로 단정적 표현해 명예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며 벌금 150만원 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더 많은 부분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여직원과의 스캔들은 물론 회식 후 몸을 만지며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부분도 무죄로 본 것이다. 성추행 피해자로 지목된 여성 B씨는 “2009년 런던 홀본 지역 가라오케 빈방에서Y 외교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구체적 내용의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반면 Y 외교관은 “2009년 직원들과의 회식 당시 술에 취하여 노래방 이후의 구체적 행적은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말해 2심 재판부는 피해 여성의 주장이 더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또 Y외교관이 교민사회에서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있다는 스캔들이 퍼져 국정원의 감찰을 받기도 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2심 재판부는 “해당 내용이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고, 다소 과장이 존재하더라도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수많은 여성들을 희롱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B씨 외에 다른 여성을 희롱했는지에 대한 근거 없이 Y 외교관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유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벌금 50만원 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2부(재판장 박상옥 대법관)는 이마저도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명예훼손죄가 적용되려면 ‘사람을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는 게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특정인을 비방할 목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재판부는 ▶외교관은 공적 인물에 해당하고, 국민의 검증과 비판이 될 수 있는 점 ▶A씨와 Y 외교관 사이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비방할 동기가 없는 점 ▶고위 외교관들의 권한 남용과 비위 행위 등을 공론화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취지로 게시글을 작성한 점 등을 들어 A씨 글이 Y 외교관을 비방하려는 게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A씨가 작성한 글의 모든 부분을 무죄로 봐야 한다는 취지로 파기환송했다고 25일 밝혔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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