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아닌 AI로 알았다?…카톡 챗봇에 성희롱 올린 남자

입력
수정2022.06.13. 오후 1:54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재판]
서울시 챗봇에 불법주차 민원 넣다
수십차례 음란메시지 입력 대학원생
성폭력특례법 위반 기소…1심 무죄에 검찰 항소
사진 언스플래쉬


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서울에 사는 대학원생 ㄱ(29)씨는 집 근처에서 반복되는 불법 주정차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참다못한 ㄱ씨는 서울시 120다산콜재단에서 운영하는 카카오톡 챗봇(메신저로 대화하는 채팅로봇 프로그램) ‘서울톡’을 통해 2020년 7월까지 총 280여차례에 걸쳐 불법주차 신고 민원을 넣었다. 문제는 ㄱ씨가 신고를 접수하면서 자신의 신원, 상대방의 차 번호 같은 필수정보뿐 아니라 음란한 메시지와 욕설을 함께 남겼다는 것이다. ㄱ씨가 38차례에 걸쳐 이러한 메시지를 남기자, 다산콜재단는 그를 고소했다. 다산콜센터 쪽이 챗봇 메시지와 관련해 법적 대응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톡은 초기화면부터 자동화된 채팅 시스템으로 54종에 이르는 민원신고를 할 수 있게 구성돼 있다. 그러나 민원신고서가 접수된 뒤에는 내용을 상담사가 인지한 뒤, 이를 담당 부서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결국 챗봇 너머에 있는 사람이 민원 신고 내용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 셈이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성폭력 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통신매체 이용 음란 등의 혐의로 기소된 ㄱ씨의 재판이 열렸다. 검은색 점퍼를 입고 안경을 쓴 ㄱ씨는 변호인과 함께 법정에 나와 미동도 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톡’의 초기 화면. 자동화된 채팅 시스템으로 54종에 이르는 민원을 접수할 수 있다. 서울톡 화면 갈무리
ㄱ씨 쪽은 “인공지능(AI) 상담사에게 보낸 것이지 사람에게 보낸 게 아니다”란 취지로 주장했다. 챗봇을 통해 신고했기 때문에 접수부터 담당 부서 이관까지 인공지능이 처리한다고 생각했지, 중간에 사람이 개입해 메시지를 볼 거란 인식은 없었다는 것이다. 재판 첫날, ㄱ씨의 변호인은 “상담사에게 (음란 메시지를) 전송한 게 아니고 챗봇에 민원을 넣는 과정에서 보낸 것이기 때문에 (범행의) 고의가 없어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동화된 챗봇인 서울톡으로 민원을 낼 때 ‘사람 상담사가 관여한다’는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음란 메시지를 볼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ㄱ씨를 기소한 검찰은 이러한 주장에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4월 열린 피고인 신문에서 검사는 “이상한 문자를 보내면 상담사·구청 직원 등 담당자가 볼 거란 생각을 안 했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ㄱ씨는 “몰랐다”는 취지의 답변을 거듭했다. 다산콜재단에 따르면 ‘상담사 민원 접수→담당자(공무원) 민원 확인 및 접수→처리결과 통보’ 3차례에 걸쳐 신고자에게 상담사와 공무원의 실명이 기재된 안내 메시지가 발송된다고 한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ㄱ씨가 280여회 챗봇 민원을 넣는 동안 여러 명의 상담사 이름이 명시된 문자가 왔을 텐데, 사람이 볼 거란 인식을 못 했냐고 재차 물었다. ㄱ씨는 이에 대해서도 “민원 처리·답변은 인공지능이 한다고 생각했다. (불법 주정차로 신고한) 차 번호 같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ㄱ씨는 2020년 7월 다산콜센터로부터 ‘음란 메시지를 자제해 달라’는 취지의 문자를 받고나서 민원제기 자체를 중단했다.

변호인 신문에서 ㄱ씨는 “문자를 확인한 후 상담사가 제가 챗봇에 쓴 글을 읽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수치스럽고, 제가 불쾌감을 줬겠다는 생각에 사과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낸 욕설 등은 불법 주정차를 한 당사자를 향한 화풀이였다고도 덧붙였다. ㄱ씨의 변호인은 최후변론에서 “‘담당 직원이 내용을 검토해 유관부서에 전달하니 성희롱은 자제하라’는 내용을 사전에 공지했어야 했다. 다산콜센터는 피고인이 민원을 중지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에 문제 된 글을 발췌해 고소했다”라며 서울시와 다산콜재단을 탓했다. 검찰은 ㄱ씨에게 징역 10월을 구형하고 ㄱ씨의 신상정보 고지 및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취업제한,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챗봇 채팅창 너머에 있는 사람을 인식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지난달 26일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민원 접수 뒤 오는 문자를) 피고인이 형식적 답변으로 이해했을 여지가 있다. 피고인은 2020년 7월 ‘서울톡으로 민원을 접수해도 직원이 보고 이관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인간이 확인한다는 점을 알게 되고 중단했다”며 “챗봇에 전송한단 인식을 넘어 사람에게 도달한다는 고의가 있다는 게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