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증권사 직원 “딸이 맘에 걸린다”…피해자에겐 사과 안 해

입력
수정2022.04.12. 오전 9:01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재판
서울 종로 거리.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클립아트코리아


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피고인석에 선 ㄱ(55)씨는 회색 양복 차림에 짧게 자른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변호인 없이 홀로 법정에 나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그의 죄목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의 카메라 등 이용 촬영’이었다. 다른 사람의 신체를 당사자 의사에 반해 촬영한 이에게 적용되는 혐의다. 증권사에서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는 ㄱ씨는 지난달 13일 법정에서 공손한 자세로 억울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벌금형으로 끝내 달라’고 재판부에 읍소했다.

사건은 지난해 4월의 어느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씨는 당시 식당이 몰려있는 서울의 한 골목에서 피해자의 가슴 부위를 스마트폰으로 찍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애초 검찰은 그를 약식기소했지만, 지난 1월 법원이 그에게 구형보다 약한 벌금 300만원의 약식명령을 결정하자, 이에 불복한 검찰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서 이날 ㄱ씨는 법정에 서게 됐다.

ㄱ씨는 재판에서 줄곧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풍경을 찍었을 뿐 피해자를 특정해 촬영한 게 아니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영업제한이 이뤄진 시간인데도 골목에 사람들이 많아 ‘감염병을 걱정해야 할 때 신기하다’라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것은 맞지만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ㄱ씨가 범행을 저지른 시기는 수도권에 5명 이상 집합금지·밤 10시 이후 식당 영업금지 등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처가 시행되던 때였다.

재판부는 ㄱ씨의 이런 주장에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주장대로 자신이 ‘무죄’라면, 왜 정식재판을 청구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ㄱ씨는 벌금형 약식명령에 정식재판을 청구하지 않았다. 정식재판은 오히려 검찰이 청구한 것이다. 범행 당시 피해자는 ㄱ씨가 자신의 모습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ㄱ씨에게 가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으나, ㄱ씨는 ‘네가 뭔데 내 지식재산권(옛 지적재산권)을 침해하고 사진을 삭제하라고 하느냐’며 따졌다고 한다. ㄱ씨에게 사과를 받지 못한 피해자는 ㄱ씨를 엄벌해달라는 뜻을 재판부에 전했다.

ㄱ씨는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변호인의 도움은 원하지 않는다. 벌금 300만원을 내고 (혐의를) 인정하겠다는 마음”이라며 벌금형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ㄱ씨가 억울하다면서도 ‘벌금을 내고 성범죄 전과자가 되겠다’는 취지의 모순된 말을 하자, 재판부는 “‘300만원 내고 (혐의를) 인정하겠다’라는 것은 없다. 공소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인가”라고 거듭 물었다. ㄱ씨는 마지못해 “네”라고 답했고, 검사는 ㄱ씨에게 벌금 300만원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및 취업제한을 명령해줄 것을 재판부에 구형했다.

ㄱ씨의 혐의인 카메라 이용 촬영 범죄가 전체 성폭력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이 발간한 2020 성범죄백서를 보면, 2013년 전체 성폭력범죄에서 7%를 차지했던 카메라 등 이용 촬영 범죄는 2018년 17%로 5년 만에 2배 이상 늘었다. 강제추행, 강간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발생 건수만 놓고 보면, 같은 기간 412건에서 2388건으로 5.8배가량 증가했다.

범행이 늘고 사회적 비판도 커지면서 법원 판결은 ‘함부로 촬영되지 않을 권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1월 레깅스를 입은 피해자의 뒷모습을 몰래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유죄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면서 “성폭력처벌법에서 정한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구체적인 보호법익은 피해자의 성적 자유와 함부로 촬영 당하지 않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처음으로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명시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울산지법 항소부도 이혼소송 중인 배우자의 신체를 동의 없이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남성에게 이런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바 있다.

ㄱ씨는 재판을 마치자 법대를 향해 “고생하셨습니다”라고 꾸벅 인사를 했다. 법정경위에게도 “수고하셨다”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고 법정을 떠났다. 지난 7일, 재판부는 ㄱ씨에게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자백하고 있고 유죄로 판단한다. 다른 범죄가 한차례 있으나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촬영 횟수와 수위 등을 참작해 벌금 300만원에 처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고 선고했다.

ㄱ씨는 법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의 마음은 끝내 전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딸들을 걱정했다. 그는 최후진술 기회를 얻자, 고개를 숙인채 “그게 법에 어긋난다는 걸 전혀 몰랐다. 나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 법 위반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처분은 받겠으나, (구속되면) 딸들과 직장이 마음에 걸린다. 벌금형으로 종결해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자신이 불법 촬영한 피해자도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