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한 침대서 잤다" 13살 성폭행 무죄로 뒤집은 베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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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1.03. 오전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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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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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13세 미만 준강간 30대 기소
1심 "피해자 진술 일관" 유죄 선고
항소심 "같이 잔 친구 진술 번복" 무죄
성폭력 이미지. 사진 픽사베이
'베프' 증언에 뒤집힌 겨울밤 성폭행
한밤중 자기 집에 머물던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30대에게 항소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큰방 침대에서 언니 등과 셋이 자던 중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 여학생의 주장이 유죄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직접 증거였는데, 이 여학생의 가장 친한 친구인 이른바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당시 겨울이라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고 침대도 좁아 3명이 밀착해서 잤다. 침대 위에 올라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한 게 반전의 기폭제가 됐다.

범행 시점과 상황에 대한 피해 여학생의 진술이 오락가락한 것도 무죄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 항소심 법원이 1심 판결을 뒤집은 근거는 뭘까. 항소심 판결문을 입수해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형사1부(부장 김성주)는 지난달 16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씨(34)의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2018년 1월 어느 날 새벽 무렵 술을 마시고 귀가한 뒤 큰방 침대에서 자던 B양(12·여)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동네 선배의 부탁으로 201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 선배와 B양 가족(친모, B양, 언니, 동생 2명)과 같이 남원 자택에서 생활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 선배와 B양 친모는 서로 사귀는 사이였다.

1심을 맡은 전주지법 남원지원은 지난해 6월 "A씨가 자고 있던 나를 성폭행했다"는 B양 주장을 받아들여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B양은 1심 법정에서 "사건 당시 언니와 또 다른 사람과 함께 A씨 침대에서 잤고, 나는 벽 쪽에서 자고 있었다. A씨는 자고 있던 나를 성폭행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러면서 "A씨가 내 귀에 대고 '좋아?'라고 말했다. 술 냄새가 많이 났었다. 내가 A씨 어깨를 손으로 밀자 A씨는 나와 벽 사이로 쓰러지듯 누웠다. 나는 그 틈에 일어나 방바닥으로 내려와서 동생과 함께 잤다"고 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전주지방법원 전경. 연합뉴스
"잠든 사이 성폭행" VS "취했지만 아냐"
하지만 A씨는 검찰에서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아이들이 옆에서 자고 있었던 날이 있었다"면서도 "그 전날 술에 많이 취해 자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1심 재판부는 ▶범행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비교적 일관되고 구체적인 점 ▶피고인 방에 있던 침대 크기를 고려하면 피해자를 간음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점 ▶원심 증인(피해자 언니 친구)이 피해자 진술에 상당 부분 부합하는 증언을 한 점 등을 근거로 유죄로 봤다. A씨는 1심 선고 직후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는 피고인의 무죄 주장을 배척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A씨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의 진술에는 사건 당시 구체적 정황에 관해 세부적인 묘사가 풍부하지 않고, 진술이 일관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진술이나 객관적 사정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상당수 존재한다"면서다.

사건 당시 큰방 침대에서 자던 상황에 대한 B양 진술이 시간이 지나면서 수시로 바뀐 점이 지적됐다. B양은 보호기관에서 "큰방 침대에 나와 언니, 내 친구가 함께 잤다. 나는 벽 쪽에서 자고 있었으며, 언니 친구와 남동생은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고 했다가 경찰에서는 "침대에는 나와 언니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나머지 한 명은 기억이 안 난다"고 말을 바꿨다. 항소심에서는 "침대에서 나와 언니, 내 친구가 자고 있었고, 언니 친구는 바닥에서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침대 이미지. 사진 픽사베이
"10대 3명도 좁은 침대…물리적으로 어려워"
더구나 B양이 '큰방 침대에서 함께 잤다'고 지목한 친구의 법정 증언은 B양 진술과 달랐다. B양 친구는 "2018년 1월 A씨 큰방 침대에서 1~2번 잔 적이 있는데 당시 B양은 침대 끝에서 자면 안 좋은 꿈을 꾸기 때문에 (침대) 가운데서 자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내가 벽 쪽에서 자고 B양이 가운데서 자고 B양 언니가 침대 끝에서 잤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A씨 침대에서 잘 때 낯설기도 하고 배도 아파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는데 당시 특별히 움직이거나 침대 위로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고, B양이 바닥으로 내려간 사실도 없었다"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친구의 증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자연스럽다"며 "친구로서 피해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짓으로 꾸며서 할 동기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범행 장소로 지목된 큰방 침대가 10대 3명이 눕기에도 좁은 점과 당시 B양 등이 겨울용 이불을 덮고 있었다는 정황도 항소심 재판부가 성폭행 가능성을 낮게 보는 요인으로 꼽혔다. 1심 법원의 현장 검증 결과 큰방 침대는 가로 136㎝, 세로 204㎝인 '더블 사이즈'였다. 사건 당시 침대에서 함께 잔 B양과 B양 언니, B양 친구는 키 140~156㎝, 몸무게 32~56㎏ 정도였다. B양 친구는 "당시 겨울이라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어서 남은 공간이 별로 없었고 침대도 좁아 3명이 밀착해서 잤다"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큰방 침대는 성인이 아닌 청소년 세 명이 누웠을 경우에도 협소한 공간으로 보인다"며 "침대에 피해자 등 세 명이 나란히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상태에서 술에 취한 피고인이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와 피해자 언니나 피해자 친구를 깨우지 않은 채 이불을 걷고 가운데서 자고 있던 피해자의 옷을 벗겨 간음하기는 물리적으로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했다.

아동학대 이미지. 중앙포토
친모 학대·외삼촌 성폭행…집 안 가려 거짓말?
또 성폭행 피해 시점에 대한 B양 진술이 바뀐 것을 두고는 "일관성이 없다"고 했다. B양은 보호기관에서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2018년 3월경"이라고 했다가 경찰 조사에서 A씨 집에 머문 시기가 그 이전으로 밝혀지자 검찰에서는 "중학교 가기 전 겨울방학 때인 2018년 1월경"이라고 진술을 바꿨다.

항소심 재판부는 B양이 사건 이후 약 10개월이 지나도록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도 의심했다. 조사 결과 B양은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2018년 2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수년 전 외삼촌에게 당한 성폭력 사건은 말했으나 정작 A씨 범행은 말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2018년 3월 경찰에서 2015년과 2017년 있었던 외삼촌의 성추행·성폭행 사실들을 진술하면서 이 사건에 관해서는 전혀 진술하지 않았는데 이 진술일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 있었던 사건에 관해 누구에게도 진술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친모의 학대로 보호기관에서 생활하던 B양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상의 성폭행 사건을 꾸몄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B양이 보호기관에 피해 사실을 최초로 알린 2018년 11월은 보호기관에서 B양의 집 복귀 여부를 논의하던 시기여서다.

재판부는 "나이 어린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정에 복귀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허위로 준강간 피해 사실을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판사봉 이미지. 사진 픽사베이
"감옥 넣을 수 있게…" 친모 증언 부탁
1심에서 B양 진술과 비슷한 증언을 한 B양 언니 친구가 항소심에서 진술을 바꾼 것도 무죄 선고에 영향을 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언니 친구는 당심에 증인으로 출석해 '원심에서 증언하기 전 피해자 어머니로부터 전화로 피고인을 감옥에 넣을 수 있게 증언해 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받았다. 사실은 피고인이 술에 취해 들어온 날 피고인은 방에 들어와 화장실을 거쳐 2~3분 정도 머무르면서 옷을 갈아입은 후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으나 이후 방바닥에서 아침까지 잤을 뿐 침대 위로 올라간 사실이 없다'며 증언을 번복했다"고 했다.

택배업에 종사하는 A씨가 직업 특성상 평소 술을 마시기 어려웠던 상황은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매월 급여일이 있는 주의 토요일에 회식해 (사건이 발생한) 2018년 1월 회식은 27일에 있었으며, 해당 회식 날 밤 12시 이전에 집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이 새벽 4시에 술에 취한 채 들어왔다'는 피해자 언니 친구의 원심 증언은 이 같은 정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검찰이 항소심 선고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A씨의 최종 유무죄는 대법원에서 다투게 됐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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