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딸의 “탄원서”를 진실한 의사가 아니라고 판결한 이유[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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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8.24. 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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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딸을 수차례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아버지에게 징역 13년의 중형이 확정됐다. 이 아버지는 재판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딸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고, 엄벌에 처해달라며 신고했던 딸은 뒤늦게 선처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법원은 성폭력 피해가 있었고, 형량은 깎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가족의 회유·압박에 시달려 입장을 바꾸기도 하는 친족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24일 밝혔다.

A씨는 2018~2019년 ‘아빠가 성병을 치료해줄 테니 성관계를 하자’, ‘점쟁이가 너랑 성관계를 해야 살 수 있다고 한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강간한 혐의 등을 받았다. 피해자의 자취방에 카메라를 설치해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한 혐의도 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A씨가 흉기로 위협하는 등 범행 수법이 점차 위험해지고 대담해져 피해자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고소에 이른 것이고 자신을 양육해 준 아버지에 대해 특별히 허위 주장을 할 동기도 없다고 했다.

대법원의 대법정, 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이상훈 선임기자, 그래픽| 이아름 기자


피해자는 재판에서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약 두 달 뒤 A씨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냈다. 1심 재판부는 그러나 이 탄원서를 반영해 A씨를 선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성폭력 범죄의 양형기준에는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이 감경요소로 들어있다. 1심 재판부는 형을 감경해 주려면 피고인이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합의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피해자는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처벌불원의 의사표시한 경우여야 한다고 했다.

A씨 사건의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피해자가 A씨의 선처를 바라는 주된 이유는 가족들이 겪는 생활고인데, ‘부양가족의 생계 곤란’을 이유로 감형해 주면 오히려 A씨가 가정 내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상과 지배적인 지위를 이용한 또 다른 범행을 옹호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태도 변화는 이 사건 발생 후 적절한 보호와 관심, 배려를 받아야 하는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신고로 인해 아버지가 처벌받고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인한 고립감, 부담감,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A씨를 진심으로 용서해 진실한 의사로 처벌불원의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피해자 답지 않다’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며 1심의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피해자는 재판에서 “성폭행을 당했지만 친아빠였잖아요. 그래서 내가 잘못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라고 진술했다.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사실과 성폭력의 충격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모습은 친족 성폭력 사건에서 자주 나타난다.

A씨는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같은 유죄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거기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징역 13년의 형량도 정당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제출한 탄원서 및 처벌불원서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경인자인 ‘처벌불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며 “A씨의 연령·성행·환경, 피해자와의 관계, 범행의 동기·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 등 여러 가지 사정들을 살펴보면 원심의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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