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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기 위험 알리지 않은 중개사 과실 책임 100%" 판결,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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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2.10. 오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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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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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사기는 '경제적 살인'…임차인 과실 탓하면서 책임 회피 말아야"

경남 진주에 사는 A 씨는 지난 2019년 7천만 원에 다가구주택에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공인중개사는 건물의 다른 호실 보증금을 임대인 말만 믿고 실제보다 낮게 기재했습니다. A 씨의 호실이 7천만 원이었지만, 비슷한 크기의 다른 호실은 500만 원이라는 식이었습니다. (대부분 이런 정보는 중개대상물확인서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중개사는 임차인에게 선순위 보증금이 적은 안전한 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2년 뒤 계약이 만료되고 임대인이 잠적해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A 씨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힘들었죠. 생업 때문에 비용을 들여서 괜찮은 집 알아봐달라고 중개사한테 의뢰한 것이고 믿고 (계약) 한 건데 제대로 된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거죠." A 씨의 말입니다.
 

중개사 "의뢰인도 조사 게을리 한 책임 있어"…법원 "과실 상계 이유 없다"


A 씨가 임대인과 해당공인중개사, 공인중개사협회를 상대로 낸 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이례적인 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법원은 중개인 말만 믿고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임차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보고 공인중개사의 과실 책임을 참작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개사의 과실을 최소 15%에서 50%까지만 인정해온 것이 그간의 판결 경향이었습니다. 반면, 창원지법 진주지원에서는 해당 중개사의 주장, 즉 "중개의뢰인에게도 거래 관계를 조사 확인할 책임을 게을리 한 부주의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기에 적극 가담하거나 임대인과 전세사기를 공모한 중개업자에 대해서는 100% 책임을 묻는 판결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한 공인중개사에 의해서 피해자가 1명인 사례, 즉 사기의 고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중개사의 과실 책임을 100%로 본 경우는 드뭅니다. 해당 사건을 맡았던 진상원 변호사는 이 판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중개사들은 보통 '조사권한이 없어 주택에 대한 권리 의무 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내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비전문가인인 임차인은 중개업자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약을 체결하기 마련이죠. 법원도 전문가인 중개업자가 더 이상 임차인을 탓하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1심 판결 전에 나온 법원의 화해권고결정에는 공인중개사법령의 취지와 중개사의 직업적 의무를 상기하게끔 하는 대목이 적혀있습니다.

"공인중개사법령의 관련 규정들이 중개업자의 중개대상물에 대한 확인 설명 의무의 내용과 방법을 상세히 정한 것은 공정하고 투명한 부동산 거래 질서를 확립하여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데 그 입법 취지가 있다. 중개업자는 임차의뢰인이 임대차계약 종료된 이후 임대차 보증금을 제대로 반환받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데 필요한 권리관계 등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여야 하므로, 등기부상에 표시된 중개대상물의 권리관계를 확인 설명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임대인에게 관련 자료를 요구하여 임차인에게 설명하고 그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중략) 만일 임대의뢰인이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 임대차 시기와 종기 등 자료 요구에 불응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중개대상물 확인 설명서에 기재할 의무가 있다"
 

공인중개사의 직업적 의무…"임대인의 조사 불응 여부까지 기재해야"

법원은 해당 주택의 다른 호실 보증금이 비정상적으로 낮았던 점은 매우 이례적이며 따라서 공인중개사로서의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적어도 임대인이 거짓으로 기재했더라도 중개사는 이 주택이 위험할 수 있다고 임차인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 이것이 '직업적 의무'라고 본 겁니다. 조사권이 없다는 중개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해당 주택의 위험성 여부를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임대인의 조사 불응 여부도 대상물 확인서에 기재해야 한다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

임대인이 변제 능력을 잃고 구속된 상태에서 해당 주택도 경매로 넘어가 보증금 반환의 길이 막막하던 A 씨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판결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전세사기 사건에서 임대인은 이미 경제 능력을 상실한 경우가 많거나 다른 곳으로 재산을 빼돌린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인중개사협회가 보증하는 공제증서는 대부분 1억 원이나 2억 원 한도여서 해당 공인중개사에 의한 피해가 여러 명일 경우 이를 N분의 1로 나눠야 하기 때문에 돌려받을 수 있는 배상금도 적습니다. 이번 공인중개사 과실 책임 100% 인정 판결은 피해자의 보증금 반환 가능성을 크게 높인다는 점에서 세입자의 피해 구제를 한층 강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구경도 못 해본 돈을 빚으로 떠안아"…부산 전세사기 피해 확산


이번 취재 도중 지난달 보도했던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전화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한 달 전보다 피해 규모도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여전히 경찰 수사는 답보라는 이야기, 세입자들이 생업을 미루고 동분서주 하고 있지만 부산시를 비롯해 어떤 책임 있는 기관도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적극 나서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부산 전세사기 역시 임대인과 친척관계라는 거짓말을 앞세운 특정 공인중개사에 의해 피해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앞서 진주 사례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공인중개사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묻는 판결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수사와 재판까지 지난한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것은 오롯이 피해자들입니다. 얼마 전 화제가 됐던 판결문 내용처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선량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임대인과 중개사의 말을 신뢰했던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모래성처럼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은 대부분 선량한 시민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일입니다. 중개사와 악성 임대인에 대한 엄중한 판결은, '집으로 장난치면 안 된다'는 상식에 힘을 불어넣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사람이 자본 없이 수백 채의 집을 소유하고도 제어받지 않는 구조, 불투명한 임대차 시장 등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은 그대로라는 점에서 정부의 '전세사기 근절' 의지를 되묻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A 씨는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이런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중개업자가 단순히 임대인과 임차인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허위로 중개하는 일은 일어나서도 안 되고 그로 인해 한가정이 완전히 파괴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으니 책임감 있는 직업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마땅합니다. 저와 같은 비슷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께 이번 판결로 용기 잃지 않고 끝까지 권리를 포기하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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