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 대신 페인트칠 해준다더니···기준치 6배 유독성 실외용[주住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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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10.15. 오후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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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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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빌라 페인트사건
임차인 “계약 해지해야” vs 집주인측 “억지 주장”
미연씨는 집주인이 도배대신 페인트를 해준다는 말을 믿고 입주를 기다렸다. 이사 첫날, 집 곳곳에서 페인트 냄새가 고약했는데, 알고보니 유독성 발암물질이 나오는 외부용 페인트가 거실 벽면에 칠해진 상태였다.|제보자 제공


※집은 일상의 평화를 담보하는 ‘살아가는 곳’이자, 생애 가장 큰 돈을 지불하는 ‘주거 상품’이기도 합니다. 경향신문 ‘주住배틀’은 집을 둘러싼 우리 주변의 복잡하고 다양한 분쟁을 전달함으로써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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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씨(가명·46)는 자녀들과 함께 경기 하남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아파트에서 살다가 2021년 영끌붐을 타고 지방 아파트 분양권을 샀다. 미연씨네는 유주택자는 퇴거해야 한다는 임대아파트 요건에 따라 전세집을 새로 구해야 했다. 당시는 하남에 전세 주택 씨가 말랐던 때였다. 하남 신도시 청약을 위해 실거주 요건을 채우려는 외지 수요가 하남에 계속 몰리면서 전세가가 치솟았고, 가격이 올라도 물량은 남아나지 않았다.

그때 부동산에서 69.42㎡(21평) 방 세 칸짜리 다세대 주택을 미연씨에게 소개해줬다. 전세가 1억2000만원인 이 집은 아주 낡고 허름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공실이었던 집이라 싱크대 수도가 막혀있었고 곳곳에 곰팡이가 핀 데다가 화장실엔 세면대조차 없었다.

이 집은 서류상으로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집 소유권이 개인이 아닌 하남의 ‘지역주택조합(지주택)’에 있었다. 지주택은 무주택자 또는 1주택(전용 85㎡ 이하) 소유주들이 공동주택을 짓기 위해 모여 설립한 조합이다. 조합이 노후주택을 사들여 임대를 주는 것인데 전세계약은 1년 단위로만 가능했다. 언제 이 지역 재개발이 진행될지 모르는만큼 세입자를 단기로만 받는 것이었다.

조합은 계약을 망설이는 미연씨에게 도배와 장판을 해준다고 했다. 단, 시트지 때문에 도배가 어려운 방문들과 거실 벽면은 페인트 시공이 결정됐다. 덜컥 계약한 뒤 곰팡이 냄새 등이 계속 걸렸던 미연씨는 전세 계약을 취소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가계약금 30만원을 날릴 수 있었고, 시중에 마땅한 대안도 없던 터라 계약을 유지하기로 맘을 고쳐 먹었다. 결국 미연씨는 돈을 더 들여 이 집에 세면대를 설치하고 이사를 준비했다. 이제 진짜 무를 수가 없었다.

문과 방 곳곳을 바른 페인트는 실외 철제용 페인트였다. |제보자 제공


2022년 11월1일 이삿날이었다. 이삿짐을 들고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화학성 페인트 냄새가 코를 타고 머리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난방을 돌려서인지, 며칠 전 입주 청소를 하기 위해 잠시 들렀던 때보다 냄새가 더 심해졌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방에 들어간 딸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더니 갑자기 구토를 했다. 미연씨는 딸 둘을 데리고 인근 모텔로 가 방을 얻었다. 그렇게 2주동안 모텔 신세를 졌다.

냄새 원인은 페인트였다. 시공업체가 실내용 수성·친환경 페인트가 아닌 실외용 유성 페인트를 집안에 발랐던 것이다. 거실 벽면과 문이 나무 재질인데 기존에 붙어있던 시트지 때문에 실내용 페인트가 예쁘게 발리지 않아, 실외용을 발랐다고 업체 측은 말했다. 유성용 페인트는 유해성 물질이 든 희석제를 같이 사용하는만큼 내부 인테리어 용으로 사용하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냄새가 빠지는 시간도 실내용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미연씨는 냄새를 이유로 조합에 임대차 계약 취소를 요구했다. 조합은 페인트 냄새가 기준치 이상임을 입증하라고 맞섰다. 미연씨는 20만원을 주고 사설 업체를 고용해 공기질을 측정하게 했다. 업체가 12일 동안 측정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총휘발성유기화합물 측정값이 평균 2409.1㎍/㎥로, 환경부 실내공기질관리법 권고 기준의 6배를 초과하는 수치가 나왔다. 페인트 원료인 톨루엔 등은 심하면 의식상실까지 초래하는 고위험 물질로 알려졌다.

조합 측은 차폐재를 다시 발라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미연씨가 전문업체에 물어보니 미연씨네 집처럼 거실에 광범위하게 발린 페인트는 차폐재 처리만으론 발암 물질 방출을 막기 힘들었다.

미연씨는 보증금 반환과 이사비용 지원을 요구했지만 조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합은 다음 세입자를 구해야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구해질 리가 없었다. 부동산에 당초 전세금보다 2000만원 더 내려 집을 내놨지만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갔다. 냄새 때문이었다.

1억 2000만원에 들어온 전세를 1억에 내놨어요. 총 3팀이 집보러 왔는데 그중 2팀이 페인트 냄새가 왜 이렇게 심하냐고 묻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무도 안들어오려고 했어요. 저 대신 누가 들어온대도 양심상 걸렸을 거에요.




조합은 미연씨가 단순 변심으로 전세 계약을 취소하려고 억지 주장을 늘어놓는다고 말했다. 다음은 조합이 경향신문에 보내온 입장을 간추린 것이다.

“임차인은 단순 변심으로 부동산을 찾아가 수차례 걸쳐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했고 조합은 계약금을 반환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계약 직후 불만이 가득했던 임차인은 입주를 마치고나서도 상수도 수약이 약하다며 항의를 시작해 조합은 계약 조건에도 없던 추가 비용을 들여 수도 수압 개선 공사도 해줬다. 그럼에도 임차인은 갖은 핑계와 트집으로 계약을 취소하려고 하며 페인트를 문제삼기 이른 것이다. 냄새 제거 무료 보수 공사를 수차례 제안했으나 임차인은 이를 거절하며 계약 해지 및 보증금 반환만을 요구하고 있다. 조합은 업체에 공사를 일임했고 페인트 등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알지 못했다.”

조합은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 조합은 서민들이 주인인 조합이다. 임차인에게 갑질은 커녕 (재개발) 사업 진행을 위해 임차인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미연씨는 조합이기 때문에 합의를 안해주고 일이 더 커졌다고 보고있다.


미연씨는 집주인이 조합이기 때문에 상황이 더 꼬인 것 같다고 본다. 개인과 개인 간 일이었다면 합의될 일이 단체 대 개인이 붙으면서 커졌다고 생각한다. 조합의 전세 1년 단기 계약 조건 때문에 세입자를 구하는 것도 더 까다롭다. 미연씨는 주택임대차계약 해지, 모텔숙박비 등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동부지법은 내달 2일 두번째 변론기일을 연다.

경향신문은 국토교통부에도 미연씨 이야기를 전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이미 소유권이 개인에게 넘어진 상황에서 벌어진만큼 정부가 나서기는 어렵다”면서 “공공분양 아파트 등의 경우 시공사가 부적절한 페인트로 실내공기질관리법 권고 기준을 어기면 정부가 나서서 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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