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입주청소 할게요” 집 비운 사이 새 임차인 들이는 신종 전세사기

입력
수정2023.05.09. 오후 5:48
기사원문
류인하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집주인, 새 임차인에 집 넘기고 잠적
새 임차인, 비정상 임대차계약 체결 후 거주
HUG보증보험 들어도 ‘점유권 상실’ 이유로
보증금 대위변제 안 돼 결국 명도소송 제기
지난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전세사기ㆍ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1만인 서명운동 돌입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나는 세입자’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집주인이 기존 세입자에게 이사 당일 “입주청소를 하려고 한다”며 집을 비우게 한 사이 새 세입자를 들이고 잠적하는 신종 전세사기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9일 경향신문 취재결과 확인됐다. 새 세입자가 집주인과 공범관계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새 세입자는 보증금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기존 세입자집에서 거주했다.

A씨(31)는 최근에서야 경찰로부터 ‘전세사기피해자 확인서’를 받았다. 그의 전세보증금 2억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은 임대인 B씨(28)는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전세사기를 내고 현재 잠적 중이다. 미추홀구에 대규모 피해를 입힌 ‘건축왕’ 남모씨와는 다른 인물이다. 그러나 B씨 역시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 빌라 60~70채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씨는 지난 2019년 8월 언니와 인천 부평구의 한 신축빌라에 입주했다. 이후 각자 독립해 살기로 하면서 2021년 7월 26일 이사를 나갈 예정이었다. B씨는 이사 당일 A씨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오후가 돼도 들어오지 않았다. B씨는 대신 “새 세입자가 이날 들어오기로 했으니 입주청소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A씨는 “입주청소를 하는 동안 집을 비운 게 이렇게 큰 피해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A씨가 언니의 이사를 돕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들어온 새 세입자는 집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 집 안에는 A씨의 짐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전자렌지, 신발, 트렁크 등이 집에 있었지만 A씨는 더이상 자신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경찰은 “법적으로 새 세입자도 계약상 권리가 있기 때문에 조치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다행히 A씨는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다.

A씨는 HUG에 “임대인이 보증금을 주지 않고 있다”며 “전세보증금 대위변제를 해달라”고 했다. HUG는 그러나 “A씨가 이미 집을 나왔기 때문에 대항력이 없다. HUG 면책규정에 따라 보증금 대위변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내 짐도 그대로 그 집에 있고, 전출신고도 하지 않아 대항력이 그대로 있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졸지에 집도 잃고, 짐도 잃고, 보증금까지 돌려받지 못하게 된 A씨에게 남은 것은 소송밖에 없었다. 임대인은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대출을 받아 전세금을 돌려주겠다는 얘기도 전부 거짓이었다. 신용불량자인 B씨는 대출 자체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짐 안 뺐어도…HUG, “대위변제 거절”


새 세입자는 계약금의 5%만 낸 상태였다. 처음 A씨는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계약금을 주고 새 세입자를 내보내기로 했다. 새 세입자는 “계약금 5%(1000만원 상당)에 이사비 500만원을 주면 나가겠다”며 버텼다. 당장 A씨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A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어 2021년 9월 A씨는 해당 집에 대한 임차권 설정등기를 마쳤다. 즉 집에 대한 전세보증금 채권 2억1000만원이 있다는 것을 등기부등본에 명시한 것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A씨가 빼앗긴 집에 놔뒀던 A씨의 물건. 전자랜지, 트렁크, 신발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A씨 집에 거주한 새 세입자는 명도소송 패소로 집을 떠나게 된 날이 돼서야 A씨에게 물건을 찾아가라며 문을 열어줬다. 해당 사진은 A씨가 이삿짐센터에 가져가지 말아야 할 물건을 알려주기 위해 찍었던 것이다.


새 임차인을 상대로 명도소송도 제기했다. 법원의 화해권고로 새 임차인은 2021년 7월 26일부터 2022년 12월 25일까지 거주한 비용을 월세로 환산한 금액을 기존 계약금 5%와 상계(채권액과 채무액이 대등해 합의에 의해 소멸케 하는 것)하기로 하고 이사를 나갔다. A씨가 집을 빼앗긴 지 1년5개월만이었다.

임차권설정등기도 마쳤고, 집도 도로 되찾은 A씨는 HUG에 다시 대위변제를 요청했다. HUG는 이번에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A씨가 명도소송을 하는 사이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임대인 B씨의 전세사기가 드러난 것이다. 경매과정에서 B씨 명의의 2억원 상당의 조세채권이 발견됐다. 사실 A씨와는 관계가 없는 체납액이었다.

소송 반복해야 하는 전세사기 피해자


HUG는 그러나 “A씨가 임대차계약을 맺을 당시 부평구 집에 선순위근저당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A씨가 명도소송을 하는 사이 B씨 명의의 조세채권이 발견됐기 때문에 조세채권 2억원이 A씨 보증금채권에 앞선다”는 것을 대위변제 거절이유로 들었다.

HUG는 A씨가 단 한 번도 점유를 잃은 적이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서부관리센터가 A씨에게 보낸 공문에는 ‘A씨가 주택임차권 등기완료 전 점유를 상실한 점은 변함없으며, 대항력과 우선변제권 상실 후 재취득 전 법정기일이 도래한 조세체권에 의해 권리침해가 발생함에 따라 보증효력이 발생하지 않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A씨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 싶으면 우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라”는 말을 듣고 현재 변호사 재선임을 준비 중이다.

그 사이 A씨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A씨는 “회사일과 보증금 되찾는 일을 병행할 수 없고, 몸도 마음도 더이상 버티기 힘들어 올해 1월에 그만두고 현재 무직상태”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재 A씨에게 남은 것은 전세보증금대출연체이자 2000만원과 변호사 선임비 600만원의 빚이다. HUG를 상대로 소송을 다시 시작하면 변호사비가 추가로 더 들어갈 예정이다.

인천미추홀구경찰은 A씨를 B씨 전세사기 피해자로 특정하고, 현재 A씨 고소건을 부천에서 인천미추홀구로 병합했다. 현재 A씨와 유사한 형태의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들이 자체적으로 찾은 결과 2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UG관계자는 “A씨가 짐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A씨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새 세입자와의 명도소송을 통해 집을 되찾기 전 점유공백은 HUG가 보호해주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HUG도 최대한 A씨를 도울 방법을 찾아봤지만, B씨의 조세가 체납된 시점이 A씨가 점유를 되찾은 시점보다 앞서기 때문에 HUG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 고충접수센터 공동센터장은 “정부제도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억울한 피해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피해를 세부적으로 파악하는 조치와 함께 예상치 못한 허점과 사각지대를 빠르게 찾아 대응하는 구체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야당은 10일 법안소위를 열어 특별법안을 재논의할 예정이다.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경제, 사회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