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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액 알바인줄 알았지 보이스피싱인줄 몰랐습니다"…이런 말 법원서 안 통합니다 [이번주 이판결]

홍혜진 기자
입력 : 
2022-06-25 07:01:02
수정 : 
2022-06-25 09: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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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범행 가담 미필적 고의 있어" 유죄 선고
"비대면 면접, 고액 아르바이트 모집
보이스피싱 범죄 연루됐을 가능성 커"

보이스피싱 피해규모 4년만에 3배로 증가
대검, 동부지검에 범정부 합동수사단 꾸려
"보이스피싱 말단부터 총책까지 뿌리뽑을 것"
사진설명
보이스피싱 CG [사진 제공 = 연합뉴스]
"고액 아르바이트인 줄로만 알았지 설마 보이스피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억울합니다." 보이스피싱 운반책 역할을 했다가 적발된 이들의 단골 멘트다. 법원은 보이스피싱 범죄의 중대성을 감안해 운반책 피고인이 범행의 실체를 몰랐다고 주장해도 유죄를 선고하는 추세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조수연 판사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지난 21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지시를 받고 피해자를 만나 1800만원을 편취해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지난해 4월 지인 B씨가 소개해준 보이스피싱 업체 조직원으로부터 '돈을 수거한 후 이를 지정된 사람에게 전달하면 하루 10만원의 보수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피해자에게 '정부 정책지원 특별보증금'관련 문자메시지를 전송해 대환대출 신청을 하게 한 후, 카드사 직원을 사칭하며 "대환대출 신청은 기존 대출 계약 위반이며, 정상적인 대출 진행을 위해서는 전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원금을 고객에게 파견한 직원에게 상환해야만 한다"고 거짓말해 피해자에게 기존 대출금 변제 명목으로 1800만원을 마련하게 했다. A씨는 조직원이 지정한 장소에서 피해자를 만나 1800만원을 받았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혐의를 부인했다. 현금이 아닌 물건을 전달하는 일로 알았고, 보이스피싱에 가담하는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같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우선 A씨가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연락했던 휴대폰을 교체해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설령 A씨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A씨가 정상적인 업무로 보기 어려운 '면접이나 채용과정도 없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건을 2회정도 전달하고 일당 10만원을 받기로 한 것'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수락한 책임이 있다고도 지적했다.

또 A씨에게 조직원을 소개해준 B씨가 수사받을 때 "전달하는 물건이 봉투에 담겨 있어 현금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고 진술한 점, A씨가 뒤늦게 B씨의 전화를 받고 보이스피싱 범죄를 의심했다면서도 수사기관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신고하지 않은 점 등도 유죄 판단 근거로 짚었다. 재판부는 이같은 정황을 종합해 "A씨에게 미필적으로나마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다는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범죄는 사회적 폐해가 크므로 죄질이 좋지 않지만, A씨가 확정적 고의로 범행에 가담한 것은 아닌 점, 피해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으며 실제로 A씨가 취득한 이익은 매우 적은 점, 피해자와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 A씨가 깊이 반성하고 있고 초범이며 어린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점도 양형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A씨뿐 아니라 보이스피싱 운반책 역할을 했다가 덜미가 잡힌 이들 대부분이 '단순한 고액 아르바이트인 줄 알았다'며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할 의사가 없었다고 항변하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A씨의 경우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만 편취액이 크거나 상습범인 경우 실형을 살게 되는 경우도 많다.

서초동의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보이스피싱은 점조직 형태로 범행이 이뤄지고 총책은 대부분 해외에 있어 지휘부에 대한 수사가 어렵다"며 "국내에서는 주로 운반책이 검거되는데 이들부터 엄벌해 범죄를 줄이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SNS나 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고수익 수금대행 등 아르바이트에 의심 없이 지원해 일을 했다가는 범죄에 가담하게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한 변호사는 "하는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가를 지급하겠다는 아르바이트는 일단 보이스피싱을 의심해야 한다"며 "특히 송금대행, 수금대행 등의 아르바이트는 보이스피싱 범죄수익 운반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또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코로나 등을 핑계로 비대면 면접, SNS면접을 고집하는 아르바이트도 보이스피싱 조직이 연루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금융회사를 사칭해 채권추심업무, 대출금 회수 등을 하게 된다고 아르바이트 내용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 심부름 등으로 모집한 뒤 실제로 접촉하면 돈을 회수해 오라는 식으로 업무 내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은 2017년 2470억원에서 지난해 7744억원으로 급증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해자도 속출했다. 2020년 1월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에 속아 420만원을 건넨 20대 취업준비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한 사건, 지난 2월 '기존 대출금보다 월씬 저렴한 이자로 대출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1억6000만원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승용차 안에서 목숨을 끊은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검찰은 보이스피싱 '몸통'을 잡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대검찰청은 서울동부지검에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을 설치하고 경찰,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국세청 등과 합동수사를 전개한다.

대검은 "최말단 현금 수거책부터 대포통장 제공자, 콜센터 직원, 최상위 총책까지 수사해 사기뿐 아니라 범죄단체 조직·활동으로도 적극 의율해 중형 선고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특히 총책은 최대 무기징역까지 구형하겠다고 밝혔다. 또 중국, 필리핀 등 보이스피싱 해외 거점 수사 당국과 공조해 해외 체류 총책·간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합동수사해 엄단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연내 범정부 합동 '보이스피싱 통합 신고·대응센터'를 설립해 신고, 처리 절차를 일원화할 계획이다.

[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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