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열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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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형제복지원 비상상고심 끝내 기각... 하지만 "대법, 소멸시효 깨부쉈다"

[강연주 기자]

  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저기 울고 있는 사람, 제 집사람입니다. 이 사건 밝혀내겠다고 저 따라서 한 여름, 한 겨울까지 같이 거리에 나가 시위하고 서명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오늘만을 기다려왔는데 결과는 기각이에요. 이제 우리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여성이 대법원 앞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쏟아냈다. 형제복지원 피해당사자인 남편을 둔 아내였다. 남편은 붉어진 눈시울로 지척에서 아내를 조용히 지켜봤다. 이윽고 남편은 취재진 앞에서 본인을 형제복지원 피해당사자라 밝히며 울분을 꾹꾹 누르고서 말했다.

"30년 전 무죄 판결 내린 대법관들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11일 대법원이 형제복지원 비상상고심 사건을 기각한 직후, 현장 분위기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긴장돼 밤잠을 설쳤다"면서 상기된 얼굴로 대법정을 찾았던 형제복지원 피해당사자 30여 명은 선고 직후 곳곳에서 주저앉거나 눈물을 쏟아냈다. 한 피해자는 굳게 닫혀버린 대법정 문을 등지고서 소리쳤다.

"국가가 우리를 잡아들인 거 아닙니까. 국가가 이 문제를 시작했으니, 그 끝도 국가가 책임져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이렇게 판결해놓고 질문 한 마디 못하고 그냥 가라고 하면...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판결의 이유] 수십 년 만의 결론, 무죄의 마침표

이날 대법원은 군사정권 시절 부랑자 수용을 명분으로 만들어진 형제복지원에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감금과 강제노역, 암매장, 성폭행 등을 일삼은 혐의를 받은 고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의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이 무죄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2018년, 2019년 당시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두 차례 제기했던 비상상고가 끝내 기각된 것이다. 

비상상고란 형사소송법에서 판결이 확정된 경우,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것을 발견한 때에 신청하는 비상구제절차다. 신청권자는 검찰총장이고, 관할법원은 대법원이다. 다만 비상상고는 기존 판결의 위법 사항을 시정할 뿐, 이미 결정 난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재심 제도와 차이가 있다.

이날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심판이 법령을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먼저 재판부는 "위헌·무효인 이 사건 훈령을 근거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중 특수감금 부분에 대해 형법 제20조를 적용해 무죄로 판단한 것은 위법하다"는 검찰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원장이 무죄 판결을 받은 근거는 비상상고 제기의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이 아니라 '법령에 의한 행위를 처벌하지 않도록' 명시한 형법 20조이기 때문에, 앞선 무죄 판결이 법에서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재판부는 문제로 언급된 내무부 훈령은 형법 제20조를 적용하기 위한 여러 전제 사실 중 하나였을 뿐이라며, "고인의 특수감금 행위에 형법 제20조를 적용한 잘못이 있더라도, (중략) 이는 전제 사실을 오인함에 따른 법령 위반의 결과를 초래한 경우에 불과하다"고 했다. 대법원의 과거 판례에 따르면 법령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전제가 되는 사실을 오인해 법령위반을 초래했을 경우, 이는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명시된 바 있다.

이어 재판부는 박 원장의 '주간감금행위' 무죄 판단을 두고는 "상급심의 파기 판결로 효력을 상실한 재판은 비상 상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판결 중 피고인에 대한 이유무죄 부분은 유죄 부분과 함께 이심됐다가 대법원의 파기판결에 의해 효력을 상실했다"라며 "이 사건(주간감금행위) 비상상고는 대상이 될 수 없는 재판에 대해 제기된 것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의 당부] "과거사위 활동 통해 피해자 회복 조치 이뤄져야"
 
 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 측이 "피해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인 피고인에 대한 특수감금의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판결은 파기돼야 한다"고 했던 추가 주장도 기각됐다.

재판부는 "비상상고 허용 여부는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며 "법령위반의 의미와 범위에 관해서는 종래 대법원이 다른 비상상고 사건에서 적용한 것과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만일 법리를 넓게 해석해 이 사건 비상상고를 허용할 경우,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언급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라며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신체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점보다 헌법의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다는 점"이라고 명시했다.

이어 "(지난해 법 개정에 따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다"라며 "위 위원회의 활동으로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돼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박준영 "대법원, 형제복지원 사건 소멸시효 사실상 깨부쉈다"

이날 형제복지원 피해당사자 및 관계자들을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하지만 법리적 한계로 기각됐을 뿐, 재판부가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니다"라며 "재판부의 판단 가운데 '기각할 수밖에 없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국가로부터 충분한 위로와 보상을 받길 바란다'고 명시한 부분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어 박 변호사는 "대법원은 판결 이유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조직적 불법행위로 인정했다"라며 "이것은 형제복지원 사건은 소멸시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법원에서 소멸시효를 사실상 깨부쉈다"고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관련 근거로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언급했다. 소멸시효를 주장할 수 없는 사례 가운데 국가의 조직적 불법행위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도 "오늘 재판은 박 원장의 과거 재판의 법리적 해석에 따른 기각 결정이었을 뿐, 재판부가 피해당사자들의 억울함을 외면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재차 말했다. 이어 한 대표는 "앞으로 시작될 과거사위 조사는 이 재판과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라며 "곧 이뤄질 과거사위 조사에 집중해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게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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