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한 협동조합 임시총회가 열리는 날. 조합원 60여명이 모이는 곳에 조합원 A씨가 법원 판결문을 들고 왔다. A씨는 조합 발기인인 B씨의 형사 판결문을 조합원들에게 뿌리며 B씨와 조합 이사장 C씨에 대해 “함께 회삿돈을 다 해 먹었다”고 비판했다. 판결문 내용은 B씨가 조합 자금 11억원가량을 횡령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C씨는 관련 수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아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
수십명의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B씨의 형사 판결문을 배포하고 C씨도 함께 비난한 A씨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1심과 2심은 A씨를 명예훼손죄로 처벌해야 한다고봤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타인의 판결문을 뿌리고 기소되지도 않은 C씨를 공공연히 비판한 A씨에게 대법원은 왜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한 걸까.
1ㆍ2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B씨가 횡령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고, 조합원들이 조합 구성원으로서 B씨의 횡령 사실을 알아야 할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판결문에는 범죄사실뿐 아니라 개인정보까지 포함돼 있다. 법원은 이런 판결문을 그대로 배포하면서 일부 판결문 내용과 다르게 “다 해 먹었다” 고 말한 A씨의 표현도 문제라고 봤다. 판결문에는 B씨가 횡령 피해를 되돌려놓았다는 점이 나오는데, A씨 말만 들으면 마치 B씨가 개인적으로 조합 돈을 다 쓰고 손해를 복구해놓지도 않은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1ㆍ2심은 “B씨의 횡령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B씨는 다수 조합원에게 전과자로 알려지게 됐고 평판이나 명예가 훼손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달리 봤다. 대법원은 “A씨가 판결문 배포로 B씨에 대해 알린 사실은 진실에 부합하고, 설령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A씨는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A씨의 행동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 이유는 A씨가 알린 사실이 그 상대방인 조합원들에게 ‘공공의 이익’에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합의 재산 관리 방식이나 재무 상태는 조합원들에게 중요한 관심사다. 조합 간부들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조합원 전체의 관심과 이익에 대한 사항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은 “A씨가 ‘해 먹었다’는 속된 표현을 썼다거나 판결문에 B씨의 인적사항과 처벌전력이 나와 있다고 해서 A씨가 B씨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을 뿌린 A씨의 행동은 ‘진실한 사실을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해 알린 것’에 해당하므로 형법 제310조(위법성의 조각)에 따라 위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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