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웹툰 작가에 ‘공동저작’ 숟가락 얹은 레진코믹스 창업자···2심도 패배

김혜리 기자
레진코믹스 로고와 ‘나의 보람’ 웹툰 이미지. 레진 공식 블로그 및 홈페이지 갈무리

레진코믹스 로고와 ‘나의 보람’ 웹툰 이미지. 레진 공식 블로그 및 홈페이지 갈무리

2013년, 만 17세이던 웹툰 작가 A씨는 웹툰 플랫폼 기업 레진코믹스의 한희성 대표로부터 만화를 연재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자신의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기회였다. A씨는 자신이 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학교 수업까지 빠져가며 열심히 만화를 그렸다. 그때만 해도 긴 법정 다툼의 시작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5년간의 법정 싸움

문제는 A씨가 레진코믹스와 ‘나의 보람’이라는 웹툰 연재 계약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A씨는 사실상 혼자 글·그림작가 역할을 했지만, 한씨는 글작가에 본인의 필명 ‘레진’을 표시해두고 저작권 수익의 15~30%를 떼 갔다.

A씨는 “제가 만든 이야기가 대표님 이름으로 올라가는 게 힘들고 괴롭다”고 문제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씨는 “작가님이 몰라서 그렇지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며 “나한테 저작권과 수익을 주지 않으면 나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A씨를 몰아붙였다. 이후 ‘나의 보람’의 저작권료가 비정상적으로 배분된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2017년 계약해지를 요구했다. 그러자 레진코믹스 측은 비밀유지 조항이 담긴 합의서를 내밀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A씨는 2018년 12월 서울 강남경찰서에 한씨를 고소했다.

A씨는 법정 다툼으로 얼룩진 5년을 보냈다. 한씨는 경찰 조사 단계부터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선임했다. 이들은 1심에서 “혼자서는 만화를 만들 능력도 없는 아마추어이자 어린 학생”이라며 “한씨의 창작적 기여 없이 A씨가 어떻게 데뷔를 할 수 있었겠냐”는 논리를 폈다. A씨가 증인으로 출석한 공판에선 예정된 질문 시간인 20분을 훌쩍 넘겨 약 1시간40분간 A씨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A씨는 당시 경험이 2차 가해로 느껴질 만큼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그는 지난 4일 통화에서 “(변호인들은) 제가 한씨에게 ‘꼬박꼬박 레진님이라고 높여 부르고 SNS 대화 빈도도 높은데 아무리 봐도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며 “‘피해자답지 않은 모습’이 있다고 질문을 빙자한 압박을 주었다”고 했다. “(한씨가 연락하면) 살갑게 안부 문자를 주고받지 않았느냐”면서 A씨의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2심 재판부도 “한씨 측 주장 신빙성 없어”

1심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5단독(주진암 부장판사)은 지난해 1월 11일 한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당초 검찰이 약식기소한 500만원의 두 배였다. 재판부는 A씨가 만들어온 글·그림 초안에 한씨는 몇 군데 수정을 제안하는 정도의 조언만 했다면서 한씨를 공동 저작권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한씨 측은 항소했다. 변호인단도 전략을 바꾸었다. 1심에선 한씨의 조언으로 콘티가 일부 수정됐기 때문에 공동창작자가 맞다는 논리를 폈다면, 2심에선 고의성을 부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A씨는 “한씨는 당시 스타트업 대표라 평판을 쌓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세상에 알려질 경우 평판이 나빠질 것이 뻔해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2심에 임했다”면서 “당시 업계 관행을 운운하면서 저작권을 편취해간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 와 ‘잘 몰랐다’고 하니 황당했다”고 했다.

2심 재판부도 한씨 측 주장을 기각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5-3부(재판장 정덕수)는 지난달 15일 1심과 같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한씨가 웹툰 및 만화 분야에서 가지고 있던 경험, 지식, 사회적 지위 등에 비추어 한씨가 공동저작자 개념을 몰랐을 것이라고는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공동저작물은 저작자들이 각각 (공동 창작에) 이바지한 부분을 분리해 이용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한씨는 해당 웹툰 창작에 수반됐을 작업과 관련된 아무런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피해자는 해당 웹툰을 창작하기 전에도 이미 콘티, 작화, 편집 등의 작업을 해 완성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한씨 측이 공동저작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A씨는 이번 판결이 저작권을 놓고 싸우는 작가들에게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독소 조항이 있는 계약서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며 저작권 편취에 동의했더라도 실질적인 저작 행위를 따질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많은 소송에 인용되면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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