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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세상을 바꾸는 아들들이 됐으면" 법원, '동성 커플' 건보 자격 인정한 이유는?

[취재파일] "세상을 바꾸는 아들들이 됐으면" 법원, '동성 커플' 건보 자격 인정한 이유는?
"곧 신랑과 신랑이 입장합니다, 큰 박수 부탁 드립니다!"
 
동성 부부 결혼식

동성 커플 소성욱 씨와 김용민 씨의 결혼식은 마치 축제를 연상케 했습니다.
핑크색 턱시도와 올리브색 턱시도를 차려 입은 '신랑들'이 춤을 추며 입장하는 결혼식.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한걸음씩 걸어가는 아들들이 됐으면 좋겠다"는 성욱 씨 어머니의 축사도 있었습니다.
지난 2019년 결혼식을 올리고 4년이 지난 지금, 이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동성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낸 행정 소송 2심에서 이들 부부가 승소한 겁니다.
 
"동성 부부라 아직 혼인 신고를 못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사실혼 관계에 있는데 저희도 다른 이성 부부들과 같이 피부양자 자격 취득 신고를 할 수 있을까요?" (소성욱 씨) 

결혼식 이듬해인 지난 2020년 성욱 씨는 건보공단 홈페이지에 이 같은 내용의 문의 글을 올렸습니다. 공단은 가능하다고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욱 씨를 용민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해줬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 이들의 사연이 언론에 알려지자 공단은 갑자기 "착오 처리"였다며 성욱 씨를 지역가입자로 바꾸고 보험료를 부과합니다. 불과 8개월 만에 공단의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이를 계기로 성욱 씨는 실질적 혼인 관계인데도 동성이란 이유만으로 건보공단이 피부양자 자격을 부인했다며 지난 2021년 행정 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월 "현행법 체계상 동성인 두 사람의 관계를 사실혼 관계로 평가하긴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습니다.  민법과 대법원,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모두 살펴봐도 혼인은 여전히 '남녀의 결합'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성 간 결합까지 확장해 해석할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소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렇다면 법원이 동성 커플의 사실혼 지위를 인정한 걸까요?

법원 동성 배우자 피부양자 첫 인정
▲ 동성부부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 항소심 기자회견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2심 재판부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고 상당 기간 생활 공동체를 형성해 동거하는 등 "외견상 우리 사회에서 혼인 관계에 있는 자들의 공동 생활과 유사한 관계를 유지했다"며 사실 관계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으로 사실혼이 성립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동성을 부부로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성 결혼'이라는 표현 대신 '동성 결합', '동성 배우자' 대신 '동성 결합 상대방'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실혼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단 판단은 1심 재판부와 동일하지만 결과는 달라진 겁니다.
 
2심 재판부는 건강보험제도의 경우 '피부양자' 자격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건강보험과 달리 국민연금과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 다른 4대 보험은 수급자 요건에 '사실혼 배우자'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건강보험법상에는 배우자 범위에 사실혼 배우자를 포함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공단은 그간 내부 업무 지침을 통해 사실혼 배우자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왔는데요. 재판부는 공단의 재량 행위가 개입됐다면 동성 커플의 경우에도 행정법상 '평등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행정청이 재량권을 행사할 때는 합리적 이유 없이 국민을 차별해선 안 되기 때문에 건보공단 처분이 '자의적 차별'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사실혼 배우자와 동성 결합 상대방은 성적 지향에 따라 선택한 생활공동체 상대방이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라며 "동성 결합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하는 차별대우"라고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재판부는 건강보험 제도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제도는 경제적 능력이 없어 직장 가입자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도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시대 상황 변화에 따라 보호 대상이 돼야 할 생활공동체 개념이 기존의 가족 개념과 달라지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피부양자 인정 여부를 가릴 때 경제적 의존도를 우선 고려해야 하며, 이런 기준이 피부양자 제도의 취지에 더 합치한다고 본 겁니다.

법원,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오늘 얻어낸 권리는 혼인으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천 가지 권리 중 하나일 뿐이고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김용민 씨, 2023년 2월 21일 2심 선고 후 기자회견)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과 관련해 "결국 입법의 영역"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건강보험제도의 경우 피부양자 자격 기준이 명확히 규정돼있지 않기에 법원의 해석과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앞으로 이 같은 권리가 인정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겁니다. 현행법이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법원의 판단은 현행법에 기초해 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입법의 열쇠를 쥔 국회에선 현재 정의당을 중심으로 성별에 상관없이 동거 가구가 기존 가족과 같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활동반자법'이 대표적입니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 공단은 상고 의사를 밝힌 상태입니다. 대법원에서 만약 판결이 확정되면 건강보험법상 규정을 충족한 동성 반려자는 피부양자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용민 씨가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동성 부부가 얻어낼 수 있는 천 가지 권리 중 하나일 겁니다. 법이 개정되지 않는 이상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에는 당장 큰 변화가 있지는 않을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지만 이번 판결이 법적 지위 인정을 앞당길 수 있는 촉매제는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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