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당했는데 가해자 됐다”…제도 허점에 두번 우는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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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1.12. 오후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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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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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폭 제기 절반 이상 ‘양측 모두 징계’
기자와 직접 관련 없는 자료사진 (게티이미지)

학교폭력 피해자 구제를 위해 마련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당사자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맞폭’으로 신고될 경우 대개 ‘쌍방 폭력’으로 처리돼 고통이 가중된다는 호소가 나온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A 양은 지난해 중순 소셜미디어(SNS)에 동급생에게 시달려왔다고 토로하는 글을 올렸다. 글에서 대상의 실명은 지칭하지 않았고 별칭으로 적었다. 괴로운 마음에 썼던 글은 약 20분 만에 지웠지만, 누군가 캡처해 같은 반 B 양에게 “너 이야기 같다”고 알려주며 사건이 공론화 됐다.

A 양 아버지가 확인한 딸 휴대전화와 일기장에는 “많이 참고 또 참았다. 그냥 죽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살기도 싫다. 이렇게 사는 건 좀 무리 아닌가” 등의 괴로움을 적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아버지는 동급생들에게 영문을 물어봤고 여러 친구들이 B 양의 손찌검 사진, 욕설·폭언이 담긴 단체톡 내용, 괴롭힘 목격담 등을 증언했다.

논란이 일자 학교 측은 “둘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학교 폭력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면 둘 다 가해자이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A 양 아버지는 ‘학폭위’가 열리면 진실이 가려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대는 변호사를 선임해 맞섰고 결국 양쪽이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처리됐을 뿐 아니라 오히려 A 양이 더 안좋은 점수를 받게 됐다. A 양이 나쁜 이미지를 주는 글을 퍼트려 B 양의 정신적 피해를 유발했으므로 학교폭력으로 인정된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나머지 양쪽의 여러 주장에 대해서는 ‘당사자 간 주장이 상반되고, 근거가 불충분 하거나 주관적 판단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사실관계로 인정할 수 없어 학교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A 양 아버지는 “심사위원들이 구체적인 증거 자료들을 들여다본 건지 의문이 든다. 주변 친구들이 다 증언을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아니라고 발뺌하니 피해 사실이 받아들여진 게 하나도 없다. 그쪽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우린 스스로 대응한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며 울분을 토했다.

“막상 겪어보니 누가 학폭위 한다면 무조건 말려”
지난해 EBS가 서울에서 2022년 학폭으로 인정된 사안 1000여 건을 전수분석해 본 결과 ‘맞폭’ 사건은 127건으로 전체의 12.6%에 달했다. 이중에는 동급생 4명이 집단으로 성희롱성 발언을 쏟아내자 참지 못하고 욕설을 한 학생에게 똑같이 3호 처분이 내려지는 등 맞폭을 제기한 사건 58.2%에서 양측 모두에 징계가 나왔다. 이 가운데 44.5%는 쌍방이 같은 등급 징계였다.

EBS에 따르면, 동급생에게 주먹으로 눈을 맞아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은 학생이 학폭위에서 가해학생과 같은 3호 교내봉사 처분을 받은 일도 있었다. 폭행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무릎을 쳤다는 게 이유였는데, 결국 행정소송까지 간 끝에 피해학생의 징계처분은 취소되고, 가해학생은 4호 사회봉사로 징계가 올라갔다.

이 사건 피해학생의 어머니는 “2차 가해라고 느낄 만큼 학폭위 결과가 거꾸로 나왔다. 저희 아이가 가해자로 나왔다”며 “(학폭위는)아이들을 위한 기관이니까 사법기관보다 판검사보다 더 공정할 것으로 신임 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지금은 누가 학폭위 한다면 무조건 말린다. 피해자라고 해도 말린다”고 토로했다.

학교폭력 전문 권성룡 변호사는 “참 안타까운 게 일방적으로 지속적으로 괴롭힘 당하던 피해학생이 너무 스트레스 받으니 끝내 참지 못하고 한 번 대응 했다가 맞폭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요즘 가해학생들은 오히려 그렇게 대놓고 하는 경우는 없고 자기들이 증거를 적절하게 좀 없애면서 가해 행위를 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피해학생이 피해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는데, 한 번 대응했다는 증거는 명확하게 남아 오히려 피·가해 학생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학폭위 모면 위한 꼼수…”판단은 주관적”
학폭위는 폭력행위의 심각성, 지속성, 고의성, 반성정도, 화해정도로 구분된 5가지 항목을 점수화하고 산출된 점수에 따라 처분을 내린다.

점수를 먹이는 것은 위원들의 주관에 달려있으며, 가해자가 반성한다는 뜻을 밝히기만 해도 조치가 경감되는 경우가 많다. 반성 노력과 관련된 문자나 편지 등 입증자료를 제출하면 설득력을 얻는다. 문제는 이게 학폭위를 모면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학폭위 구성원은 교육청담당자, 교육공무원, 전 ·현직 교육자, 관할구역 학부모, 판·검·변호사, 경찰, 의사 등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이중 전체 위원의 3분의 1 이상이 학부모여야 한다. 그러나 법조인이나 경찰, 의사 등의 전문성을 가진 위원의 경우 포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학폭위는 사실상 봉사직이나 다름없는데 시간이 곧 돈인 전문가들이 몇 시간씩 시간을 쏟아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지역의 학폭위원으로 활동했던 변호사는 “변호사들이 아무도 지원을 안 하고 자꾸 나가기만 하니 어느 순간부터는 변호사도 아예 안 들어가고 나머지 위원들로만 학폭위를 연다”고 귀띔했다.

이러다 보니 일부 학폭위에서는 당사자들에게 묻는 질문의 수준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전언이다. 객관적 질문보다는 주관적 ‘훈계’나 ‘덕담’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 “회의감 들어”…“선도 목적 현실”
학폭위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학부모들 몇 명이 앉아서 학생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한 자질이 있나 보면, 포털에서 몇 글자본 걸 마치 사실인 양 올바른 법리인 양 생각하고, 변호사가 얘기해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가르치려 든다. 다수결로 하다 보니 변호사 혼자서 얘기해 봐야 먹히지도 않고 거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명감 하나만 갖고 이 학생 인생을 내가 구제해 줘야지 하며 참여하는 건데, 먼 길을 가서 심의한다 한들 거기 앉아 계신 다른 위원님들이 말하는 수준을 보면 크게 회의감이 든다. 어머니 아버지뻘 되는 위원님들 모셔놓고 이것과 이것 파악해 주시고 관계 하나하나 살펴 이런 질문 꼭 해주시라고 부탁해도 아무도 안 듣는다”고 토로했다.

다만 또 다른 학폭위 전문가는 “법에서 학폭위의 목적은 사실 처벌이 아니고 교육과 선도라고 돼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보이는 태도에 따라 처분은 달라질 수 있다. 반성이나 화해의 정도를 판단함에 있어서 화해는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노력을 했구나’하는 판단 요소로 삼을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폭력 전문 남현혜 변호사는 “피해자 입장에서 학폭 처분을 받거나 가해자가 받은 결과를 받아봤을 때 억울한 감정을 느끼시는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처분을 내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에게 무거운 처분을 내리는 게 피해자 보호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아이가 가능성이 있고 이번 일을 계기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고 선도 될 여지가 있다면 또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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