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생명권이 친권보다 상위 개념”…부모 반대해도 아이 치료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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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6.24. 오후 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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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질환 앓는 4살 아이 아버지
경제적 이유 들어 수술 거부하자
서울대병원 “진료방해 말라” 신청
서울고법 “생명권 위해 수술 허용”
한겨레 자료 사진


지난 2일 서울대병원에서 천아무개(4)군의 기관절개 수술이 진행됐다. 간질발작 뇌병증(CASK, 이하 뇌병증)을 앓고있는 천군은 지난달 28일 서울고법 대등재판부인 민사25-1부(재판장 박형남)가 내린 결정 덕분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뇌병증은 심한 지적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나 대화는 물론이고 기침을 하거나 음식물을 삼킬 수도 없다. 전 세계에서 뇌병증 진단을 받은 사람이 200명도 채 안 되는 희귀질환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3월 뇌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천군은 기관을 삽관한 상태로 폐렴 치료를 받았으나 이를 오랜 시간 유지할 경우 호흡곤란 등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당시 천군의 생명을 연장할 방법은 기관절개 수술뿐이었다. 하지만 천군 아버지는 경제적 이유 등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이혼소송 중인 어머니도 친권 행사 의사가 없었다. 결국 서울대병원은 자체 윤리위원회를 열어 “친권 남용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린 뒤 천군 아버지를 상대로 진료업무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경제적 문제, 종교적 신념 등으로 부모가 자식의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친권자의 치료 방해를 막아달라’며 병원이 법원에 판단을 요구한 건 이례적이었다.

1심에선 “가처분 신청 자체가 부적법하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친권자의 동의를 갈음하는 재판’을 하려면 가정법원에 재판을 청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서울고법 항고심 재판부는 “이 사건 신청은 친권자의 동의가 없더라도 환자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진료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것이고 그 치료에 반대하는 친권자의 방해를 배제해달라는 취지”라며 “천군 아버지에게 서울대병원이 행하는 일체 치료 행위를 방해해서는 안 되고 기관절개 수술 전 퇴원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명령했다.

재판부는 이어 “생명권은 스스로 처분할 수도 없는 지고의 권리”라며 “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아동임을 감안하면 생명을 연장하고 싶어한다고 봄이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친권자가 합리적 이유 없이 친권을 남용해 거부한다면 그 거부에도 불구하고 생명권 존중 차원에서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생명권이 친권보다 상위개념임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강조했다.

서울고법의 가처분 인용 결정이 내려진 뒤 천군은 6일 만에 기관절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현재 일반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있다. 수술 비용을 포함한 치료비 역시 응급의료기금이나 병원 후원금 등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서울대병원 쪽을 대리한 신현호 변호사는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부모가 자식의 치료를 거부하면 의료진이 치료 의무가 있다 해도 최소한의 진료 행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결정은 의료진이 적극적인 치료 행위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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