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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73시간 일했는데 공짜라니···” 직장인 울리는 포괄임금제

조해람 기자

“주·야간 스케줄 근무로 주당 73.5시간 일합니다.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고요. 그런데 회사는 ‘포괄임금제’를 들이밀며 어떤 수당도 지급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야근수당을 안 주는데 아무도 연장근로수당을 왜 못받는지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혼자 끙끙 앓기만 해요.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아서요.”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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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보상 없는 과로에 내몰리고 있다. 많은 사업주가 연장근로수당 등을 기본급에 포함하는 포괄임금제를 악용해 ‘싼값에 더 많이’ 일을 시키고 있다.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조건이 아닌데도 포괄임금제를 고수하는 사업주도 많았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유연화’가 이 같은 과로를 더 가속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21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의 ‘장시간 무료노동의 늪: 포괄임금제 보고서’를 보면, 수많은 직장인이 포괄임금제로 인해 공짜 노동과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며 직장갑질119에 고충을 호소했다. 직장갑질119는 2021년 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접수된 상담 신청 중 포괄임금제 관련 상담 41건을 따로 추려 분석했다.

포괄임금제는 한국 직장인 10명 중 3~4명꼴로 적용받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전국의 10인 이상 사업체 2522개를 대상으로 벌인 ‘2020년 포괄임금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사업체 37.7%는 “법정수당을 실제 일한 시간으로 계산해 지급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최대한 부려먹는다, ‘자유이용권’처럼···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상담 신청을 살펴보면, 가장 큰 고충은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이었다. 한 직장인은 “회사 물량을 맞추기 위해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약 12시간 일했다. 시간외근무수당은 주 4시간만 적용됐다”고 했다. 또 다른 직장인은 “1주일 내내 하루에 4시간 이상 사무실에서 연장근로하고 집까지 와서 일했는데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일한 건가 싶다”고 했다.

포괄임금제가 장시간 노동 수단으로 악용되는 구조는 흔히 ‘자유이용권’에 비유된다. 보고서를 집필한 직장갑질119 심준형 노무사는 “포괄임금제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는 노동자가 받는 임금 구성항목에서 연장근로를 법정 최고한도까지 규정하는 것”이라며 “무제한 이용권을 받은 것처럼 연장근로 한도 최대한까지 장시간 노동을 지시하게 되고, (최대 주 52시간인)한도를 넘기면서 지시하는 때도 잦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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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들은 포괄임금제를 명목으로 ‘공짜 노동’을 강요했다. 연장근로수당을 한 번도 받지 못해 노동부에 신고했다는 한 직장인은 “달력에 매일 꼼꼼하게 기록해둔 노동시간을 증거로 제출했지만, 회사에서는 누가 봐도 엑셀로 급히 위조한 출퇴근기록부를 노동부에 제출했다”며 “근로감독관은 회사가 출퇴근기록부를 위조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고 했다.

포괄임금제로 임신 노동자의 모성도 위협받고 있었다. 한 간호사는 “임신 소식을 알리자 병원에서 3일 후 연봉 500만원 삭감을 통지했다”며 “2시간의 육아기 노동시간 단축제도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야간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한 것”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 74조는 임신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을 이유로 한 임금삭감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를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다.

대놓고 최저임금을 위반한 사례도 발견됐다. 직장갑질119가 확보한 한 회사의 2022년 근로계약서를 보면, 해당 회사는 포괄임금제 월급으로 191만6670원을 책정했다. 2022년 최저시급 9160원을 통상노동시간으로 계산하면 191만4440원이 나와 얼핏 보면 이 회사는 최저임금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회사는 평일 8시간 근무에 더해 토요일마다 격주로 3시간30분 근무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회사는 최소 월 201만8864원을 줘야 한다.

방치해온 정부···이 와중에 “노동시간 유연화?”

법원 판례는 포괄임금제를 ‘노동시간을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규정한다. ‘노동자의 분명한 동의’가 있어야 하고 ‘노동자에게 불이익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업주가 유효하지 않은 포괄임금제를 직장인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직장갑질119가 입수한 한 회사의 근로계약서는 노동시간을 ‘오전 10시~오후 8시’로 분명하게 명시해놓고도 포괄임금을 산정했다. 이 회사 노동자는 “건물 출입 카드가 있어서 출퇴근 시간 산정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근로계약서에 포괄임금제를 명확하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노동자로서는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워 ‘꾹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심 노무사는 말했다.

경향신문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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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포괄임금제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7년 문재인 정부는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노사가 명시적으로 합의해야만 포괄임금제의 유효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포괄임금제 사업장 지도지침’을 도입하려 했다. 포괄임금제는 법에 명시된 근로계약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 지침을 통해 엄정하게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정부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지침 발표를 계속 미뤘고, 임기가 끝나면서 지침도 흐지부지됐다.

새로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노동시간 유연화’ 기조를 명확히 하면서 포괄임금제를 비롯한 장시간 노동 문제 해결은 더 안갯속으로 빠졌다. 윤 정부 노동정책 밑그림을 그리는 전문가 기구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주 52시간’인 연장노동 관리 단위를 최소 월 단위까지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터다. 이러면 최대 주 69시간까지 연장노동이 가능해진다. 직장갑질119 권남표 노무사는 “1주일에 40시간 넘게 일을 시킬 수 있는 포괄임금제는 연장노동에 대한 거부권을 무력하게 만든다”며 “시대에 역행해 장시간 노동을 유도하는 노동시간 유연화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지난 14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5위였다.

직장갑질119는 “근로계약서에 시급을 반드시 명시하도록 의무화해야 하며, 미리 정한 수당을 월 급여에 포함하는 근로계약을 금지해야 한다”며 “미리 정한 월 급여액은 모두 ‘기본급’으로 간주하도록 법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사용자에게 노동시간 기록 의무를 부과하고 입증책임을 부담시킨다면 포괄임금제에 따른 임금 분쟁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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