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방청석에 앉자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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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1.12. 오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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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재판 돌아보기(하)[경향신문]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과 n번방 사건 등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 들끓은 젠더 이슈의 중심에는 법원의 성범죄 재판이 있습니다. 법원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성범죄가 양산된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고, 아예 법을 뜯어고쳐야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재판다시돌아보기팀이 지난 9월 ‘성범죄 재판 함께 돌아보기’ 포럼(팀장 유성희 판사, 포럼총괄 유현영 판사)을 열었습니다. 현직 판사들과 시민들이 성범죄 재판의 현실을 짚어보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토론한 자리였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판사·변호사·검사·법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활동가·교수 등 200여명이 온라인 화상대화 프로그램 줌(Zoom)으로 참여했습니다. 법 이야기는 어렵지만 필요합니다. 포럼 내용을 두 번에 걸쳐 보도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방청연대’입니다.


법정에 선 미투 관련 일러스트. 이아름 기자


법정 방청석에 피해자 있는 걸 알면
달라지는 재판부·검사·변호인 태도
성범죄 재판 방청 대중으로 확산
‘익명의 여성들’ 사법시스템 감시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의 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법정엔 보통 방청객이 별로 없다. 고위공직자 등 특별히 사회 이목의 집중을 받는 사람의 재판이 아니라면 평일 낮 시간대에 재판을 보러 법원을 방문하는 일반 시민은 흔치 않다. 어려운 법률용어로 뒤덮인 재판은 이해하기도 어렵다. 성폭력범죄 재판도 물론 그렇다.

조용했던 법정에 연대자D(트위터 활동명· @D_T_Monitoring )가 발을 들여놓았다. 자신도 성폭력 피해자였던 연대자D는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공판검사에게만 맡겨둘 수 없어 직접 법정에 갔다. 조사 과정에서 가명을 사용했는데도 피고인 측이 실명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재판을 보던 도중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계속 재판을 방청하면서 자료를 찾고, 쟁점에 관한 피해자 입장을 담은 의견서나 엄벌해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냈다. 그때부터 연대자D는 직접 성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재판을 방청했다. 피해자와 직접 연대하지 않는 사건이더라도 감시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는 사건이면 전국 법원을 돌아다녔다. 연대자D는 성범죄 재판을 방청해야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했다. “방청석에 피해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판사, 공판검사, 피고인 측 변호인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이번 포럼의 한 주제가 ‘방청연대’였다. 연대자D가 직접 포럼에서 방청연대 활동의 과정과 의미를 발표했다. 이는 최근 몇 년간의 젠더 이슈 흐름과 맞닿아있다.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재판에 넘겨졌고 시민들 시선도 함께 법원으로 향했다. 가수 고 구하라씨 사망 전후 불법촬영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불거지면서 분노로 폭발했다.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과거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성범죄 재판 방청과 모니터링이 대중적인 움직임으로 확장됐다. 연대자D는 트위터에 기반을 둔다. 그가 트위터에 재판 일정을 올리면 시민들이 일정을 보고 법정을 찾는다. 자신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지는 않지만 성범죄 재판 방청을 위해 모인 ‘익명의 여성들’이다. 재판 방청 후엔 인터넷에서 후기가 공유됐고, 사법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토론이 활발해졌다.

연대자D는 “이 흐름에서 방청연대는 연대방식의 하나로 자리잡게 됐다”며 “관심있는 사건들의 많은 수가 서울에 몰려 있었는데, 수도권 외 지역에서 재판일정에 맞춰 서울까지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재판 방청에 대한 일반인들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법원에 사람들이 올 수 있구나. 비전문가여도, 일반인이어도 방청을 통해 피해자에게 힘이 될 수 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연대자D)

지난 7월1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n번방 사건의 제대로 된 처리를 촉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2018년 3월4일 ‘3·8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시민들이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정지윤 기자


연대자D “시간내 법정가는 시민들,
사회정의 지키는 법원 변화 바라”
법원 내부선 “피해자 지위 회복 역할”
여론 재판·피고인 방어권 침해 우려도


재판 방청만으로는 아쉬웠다. 실질적인 사법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다 정밀하고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연대자D는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선 성범죄 판결을 분석하고 법원 판단의 문제점을 공부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판 방청이나 세미나가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연대자D의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불신과 체념, 냉소는 너무나도 쉽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입으로 판사를 욕하고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돈을 들여서라도 기꺼이 법원에 오는 이들은 그래도 사법절차의 마지막에 있는 법원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곳이기를 바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움직임을 통한 변화를 믿고 있으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싶어 한다. 방청연대는 이러한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믿음과 바람이 담긴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법원 내부에선 여러 반응이 있다. 시민들이 방청을 통해 성범죄 재판을 감시하는 게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재판의 독립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자칫 방청연대를 법관이 지나치게 인식해 여론에 의한 재판이 이뤄질 수 있고,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다.

포럼에서 성언주 판사는 방청연대 활동이 헌법에 규정된 공개재판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사법신뢰 회복과 법률전문가 집단에 대한 시민의 감시라는 차원에서 긍적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성범죄 재판에서 소외될 수 있는 피해자 지위의 회복에 있어서 방청연대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형사피해자의 권리가 헌법과 형사소송법 등에 정해져 있지만 피해자가 재판에서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에 증인으로 소환되거나 피해자 스스로 진술권 등을 적극 행사하지 않는 한 재판에서 소외될 수 있다. 성 판사는 “방청연대의 존재는 형사재판절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 피해자의 존재와 그 관점을 일깨우는 기능을 할 수 있다”며 “방청연대 같은 외부 감시자가 있는 법정에서는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 보장이 더 적극적으로 실현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만 성 판사는 “조금이나마 여론에 의한 재판으로 변질되거나 피고인의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사실상 침해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성 판사는 또 “최근 들어 특정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법관 개인을 향한 인신공격이 많아졌다”며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형사재판절차에 대해 여론에 의한 부당한 간섭을 야기해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n번방에분노한사람들, 모두의페미니즘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7월8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씨에 대한 미국 송환 불허 결정을 규탄하며 사법부와 사법정의의 장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연대자D와 시민들이 방청연대 활동을 하면서 수집한 방청기 속에 나타난 법원 풍경>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보고 있음에도 피해자와 합의를 진행 중이며, 합의를 위한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물론 당시 피해자는 합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없고, 합의 의사도 없었다. 재판을 본 피해자가 본인의 입장을 정리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2차 공판에서는 재판부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피해자가 있는지 물어본 후 피해자를 일으켜 세워 “탄원서를 다 읽어봤다. 방청석에 있는지 몰랐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라”고 했다. 판사들은 피해자가 방청석에 있을 때와 없을 때 태도가 너무 달라진다.

▶지법 합의부 1심 재판 시작 후 방청석에 앉아있는 피해자를 보더니 판사가 일으켜 세웠고, “젊은 나이에 왜 이렇게 고통을 받냐, 다 잊고 새출발하라, 시간 낭비다, 다른 사람 만나라”는 발언을 이어서 했다. 부장판사의 이런 발언을 배석판사들도 막지 않았고, 검사 역시 문제제기하지 않았다. 데이트폭력으로 오랜 시간 고통 받다가 헤어진 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피해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방청석에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재판부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최근까지도 영상 및 사진에 대한 증거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재판부 및 공판검사의 노력이 부족해 보였다. 미성년자 대상 성착취 범죄였음에도 피해자 변호사는 출석하지 않고 일반인 방청객 몇 명이 있는 상태에서 공판검사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사진 등을 법정 스크린에 띄우고, 재판부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상태로 재판이 이어졌던 적이 있었다. 이후 그 재판부의 다른 사건을 방청하게 되었는데, 재판부는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던 유사 사건의 재판에서는 증거조사 방법 하나하나에 공판검사 및 피해자 변호사의 의견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판사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디지털 성범죄 재판이었는데 재판부가 관련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해당 재판의 공판검사 역시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재판부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 변호사도 없어서 결국 방청석에 있던 피해자 본인이 설명을 하거나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법정은 조용했고 이들의 판결을 바라보며 분개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너무나 차분하고 평화로운 듯 한 법정에서는 법관에게 감사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범죄자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나갈 뿐이었다. 피해자가 “제대로 판결해주셔서 감사하”고 법관에게 고마워하는 사회가 아닌, 범죄자가 판사에게 고마워하는 사회이자 사법부인 것을 알게 해줬다.

지난 6월1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한 시민이 들고 있는 피켓에 “제대로 된 처벌이 성착취 근절의 시작이다”라고 쓰여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방청석에 방청연대를 위해 모인 이들이 많이 앉아 있었더니 재판부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이어서 “여론재판은 안 된다”라고 말했다. 방청객들이 지침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공개심리로 진행되는 공판의 방청석에 앉아있는 것이 무슨 문제가 돼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해당 재판부는 방청객들의 수기도 불허했다. 일반 형사재판에서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해서 아주 특이하고 예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판사가 방청 인원이 많은데 다 방청할지 의사를 물었는데 피해자가 입장 전 방청연대가 뭔지 알아서 그런지 그대로 방청하기를 원했다. 좌배석이 가해자가 비공개를 원한다고 작게 말하니까 재판장이 피해자에게 재차 정말 이 사람들이 다 있길 원하는지, 아는 사이인지 물었다. 피해자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연대자들이 법정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재판장은 조금 당황하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더니 피해자의 성적인 얘기와 증인의 사생활을 이유로 들며 연대자들을 퇴장시켰다. 피해자는 SNS에 피해사실을 다 공개한 상태였다. 그리고 연대자들이 머물기를 바란다고 말했는데 피해자의 사생활을 이유로 피해자의 편에서 재판을 모니터링해줄 사람을 퇴정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던 피해자가 증인신문 도중에 판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반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나이에 그것도 못 알아듣냐”고 판사가 말했다. 피해자가 충격을 받아 벌벌 떠는 모습이 방청석에서도 보였다. 이어서 자신도 잘못했다고 느꼈는지 누그러진 말투로 피해자에게 말을 붙였지만 피해자가 너무 얼어붙어서 휴정을 요청했다. 피해자가 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게 바로 언어체계다.

▶증인신문을 하면서 피해 영상을 법정에서 틀었다. 피해자 본인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교정기관 관계자들 포함 피해자를 제외하고 모두 남성들로만 구성된 법정에서 해당 영상을 그 큰 스크린으로 현출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피해자는 증인신문 후 구토를 했고,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너무 힘들어했다. 최소 인원+최소 노출을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피해자가 너무 힘들어한다.

▶판사의 모습은, 피의자의 행위로 인해 수많은 피해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음에도 사건에 대해 더 알려고 하는 모습이 아니었고, 그저 건조하고 무관심한 말투로 빠르게 질문들을 이어가는 모습이어서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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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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