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나타난 땅주인 “6천평 돌려줘”…마산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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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04.26. 오후 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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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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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땅 사들인 지주 가족들
50여년 만에 나타나 95명 상대 소송

주민들 “조부모 때 거래된 토지” 주장
법원 “70년 전 토지 거래 입증 안 돼”
‘점유취득시효’ 인정 못 받아 쫓겨날 위기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마산 3리 마을 담벼락에 걸린 펼침막. 마산리 10가구 주민들과 그 가족 36명은 지난 2월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한 뒤 옛 지주 가족에게 토지 소유권을 이전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소송에서 이 집은 이겼고, 바로 옆집은 졌어. 건너편 저 집도 졌는데 그 앞집은 이겼어.”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마산3리 주민들은 언제부턴가 소송에서 ‘이긴 집’과 ‘진 집’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 토지 대부분을 사들였던 옛 대지주 박기택(가명)씨 가족들이 50여년 만에 나타나 “소유권은 우리(지주 가족)에게 있으니 땅을 돌려달라”며 마산3리 24가구 주민과 이들의 가족 등 95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기 때문이다.

12년 동안 지리멸렬한 법정다툼이 이어졌고, 법원 판결에 따라 주민들은 쪼개졌다. 박씨 일가가 돌려달라고 요구한 토지의 면적은 임야와 대지 등을 포함해 2만122㎡(약 6천평)에 달한다.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한 10가구 36명은 현재 땅 소유권을 넘기고 철거 소송을 당해 집이 가압류된 상태다. 지난 20일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으로 알고 살았는데 법이 나가라고 하니 속상하다”고 고개를 떨궜다.

■ 한국전쟁이 잉태한 소송




마을 주민들과 박씨 일가 사이 ‘소송전’의 불씨는 70여년 전 잉태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충남 대지주의 첫째 아들 박기택씨가 홀연히 사라지면서다. 휴전 뒤에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조부모가 1956년 마산리에 모습을 드러낸 박씨의 어머니 이윤희(가명)씨와 토지 매매계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씨는 이런 방식으로 박씨 일가가 소유했던 충남 일대 토지 상당 부분을 팔았다고 한다. 네살 때부터 지금 집에 살면서 83살 노인이 된 김남형씨는 “전쟁 직전인 1949년 당시 마을 이장이 대표로 나서 박씨와 친모 이씨 등과 함께 토지 매매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56년 모친 이씨가 돌아와 토지 계약을 마무리 한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선동기(65)씨 등 일부 주민들은 토지 거래를 입증하기 위해 박씨 인감이 찍힌 땅 매도증서와 영수증 등을 보여줬다.

그러나 박씨 후손들은 2009년 1월 대전지법 논산지원에 소송을 내면서 “1956년 당시 이씨는 아들 소유의 토지를 매도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씨와 마산리 주민들 사이 토지 거래는 모두 무효”라고 주장했다. 후손들이 ‘불법 점유’를 이어왔으니 땅을 자신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씨 가족들은 주민들이 제시한 매도증서와 영수증도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씨 가족은 법정에서 마산리 주민들이 매도증서를 위조해 땅을 빼앗아 지금까지 소유한 것이란 입장을 고수했다.

마을 주민들은 박씨 가족이 이씨가 2000년 사망하기 전 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가 2008년 박씨의 실종 신고를 하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 의아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20년간 소유의 의사를 갖고 부동산을 점유한 자에 대해 소유권 취득을 인정해 준다”는 민법 245조로 박씨 가족과 맞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살았는데 설마 쫓겨나기야 하겠냐”는 믿음이 있었다.

25살 때 마산리에 시집와 60여년을 이곳에 산 이순덕(85)씨. 남편을 떠나 보내고 현재 혼자 거주 중인 이씨도 소송에서 져 집을 철거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 “토지 매도 증서 있다” vs “위조된 것…입증 증거 안돼”




그러나 법원은 주민들이 아닌 박씨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어머니) 이씨가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박씨에게 땅을 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등기서류를 구비해 준 점을 수긍하기 어렵다(대전지법)”며 이씨와의 토지거래는 ‘무효’라고 못박았다. 법원은 증거로 제출된 당시 매도증서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는 이유 등 토지 거래가 실제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마산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선동기씨는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때의 일인데 어떻게 (소유를) 증명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박씨한테 땅을 샀다는 이야기를 어른들한테 들었으니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다만 소송을 당한 24가구 중 토지 소유권을 빼앗긴 건 10가구다. 이씨에게 토지를 사들인 이들에게 다시 땅을 사서 10년이상 살아온 주민들은 법원이 ‘과실 없는 선의의 점유자’로 땅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2017년 12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남편이 선대로부터 땅을 상속받아 지금까지 살았던 이경숙(80)씨는 “쉽게 말해서, 옛날부터 산 사람은 (소송에서) 졌고, 사고 판 사람이나 나중에 산 사람들은 이긴 거였다. 다들 똑같은 조건이었는데, 우리 생각으론 옛날부터 땅을 소유한 사람이 소송에서 이길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박씨 가족이 인근 농소리 주민들을 상대로 낸 비슷한 소송에서 법원이 주민들 손을 들어준 것도 마산리 주민들 속을 쓰리게 한다. 2011년 1월 대전고법은 “6.25 사변으로 행방불명된 아들의 재산을 (친모가) 매도하는 것에 법률전문가가 아닌 마을사람들로서는 적법한 것으로 오해하고 매수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씨나 박씨 가족이 (소송 전 까지) 5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농소리 주민들의 점유취득시효를 인정했다.

현재 마산리 주민들을 대리하는 노희범 변호사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당시 마을 사람들로서는 생모 이씨가 행방불명된 아들의 재산을 매도한 것을 적법한 것으로 오해하고 매수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점유취득시효에 대한 폭넓은 인정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선동기(65)씨가 법원에 제출한 매도증서. 마을 주민들은 오른쪽 아래 날인된 인감은 당시 토지 소유자였던 박씨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박씨 가족은 위조된 문서일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법원에서도 이같은 문서의 효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 12년간 소송으로 흉흉해진 마을




한 마을에서 소송에 진 사람, 이긴 사람이 앞집과 옆집에 모여 살다 보니 마을 분위기도 좋을 순 없다. 마을 주민 70대 김지완씨는 “한 동네에서 이긴 사람은 이겨도 좋아하질 못하고 진 사람한테 미안해 얼굴을 맞댈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12년째 이어온 소송으로 주민들도 지쳐가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짓는 마을 주민들은 그동안 돌려줄 위험에 처한 토지 면적대로 비율을 나눠 변호사 수임료를 댔다. 김미숙(69)씨는 “이렇게 오래 소송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시골 사람들이 소송 준비에 대해 뭘 알겠나. 저렴하게 하려고 동네 아는 분들 소개로 변호사를 썼었다. 소송을 몇 년을 하니 비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처음부터 대형 로펌, 전관 변호사를 찾아갔더라면 좀 나았을까 싶은 후회마저 든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스물 다섯에 시집와 60년을 한 집에 살았던 이순덕(85)씨는 “원래 헛간도 고치려고 했지만 집을 나가야 할 수도 있는데 괜히 돈 들이면 뭐하나 싶어 그만두었다”며 멍하게 집을 바라봤다.

소송에서 패소한 뒤 집이 가압류 상태에 들어가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쉼터에 모인 마산3리 주민들


■ 답답한 마음에…헌법재판소 가는 주민들




10가구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2019년 박씨 가족을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지만 1·2심은 이전 패소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여 박씨 가족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도 지난 2월 이 사건을 ‘심리불속행 기각’(본안 심리도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 판결했다.

악에 받힌 마을 주민들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이 사건의 정당성을 되묻기로 했다. 지난 2월 대법원이 이 사건을 아무 심리도 하지 않고 기각하면서 판결의 이유도 밝히지 않았으니 재판청구권과 평등권 등을 침해했다며, 해당 재판을 취소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이다. 더불어 대법원 심리불속행 사건은 판결 이유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한 특례법과 법원의 재판은 취소할 수 없도록 한 헌법재판소법 68조에 대한 위헌 여부도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남형씨는 “마지막 재판에서 졌을 때 대법원은 어떤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1·2·3심을 왜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 노 변호사는 “심리불속행에 따라 판결 이유를 적지 않는 것은 오랜 문제로 지적돼 왔다. 마산리 사건처럼 유사한 사건에서 엇갈리는 판결이 나왔을 때,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끝나 버리면 사법 불신의 골도 깊어지기 쉽다. 이런 문제에는 대법원이 이유 기재를 하는 등 불신을 해소할 필요도 있다”고 짚었다.

글·사진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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