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부인이 갈취한 수십억 원, 남편이 꿀꺽…반환 책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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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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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돈을 갚을 능력이 부족한 채무자가 가뜩이나 적은 자기 재산을 남한테 준다면 채권자 입장에선 화가 나겠죠. 이렇게 채무자가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감소시키는 행위를 '사해행위'라고 부릅니다. 채무자의 이러한 증여, 양도, 대여 등 법률행위를 취소하고 채무자의 재산으로 다시 원상회복시키는 예외적인 소송이 바로 '사해행위 취소 소송'입니다.

무속인에게 속아 수십억 원을 갖다 줬는데 이 무속인이 남편에 돈을 증여한 경우, 이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사해행위 취소를 다룬 소송 결과가 최근 나와 소개해 드립니다.

■ "재물복 덜어내야 시장 당선…선거 끝나면 돌려주겠다"

앞서 A 씨는 2012년 한 봉사단체에서 무속인 B 씨를 알게 됐습니다. A 씨는 아들이 미국 소재 명문대에 합격하도록 B 씨에게 굿을 맡긴 것을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됐습니다.

그런데 B 씨는 2016년 3월 자신의 법당에서 A 씨에게 "당신 남편은 재물복을 덜어내야 나쁜 액운을 물리치고 공천을 받아 OO시장에 당선될 수 있으니 나에게 돈을 맡겨라. 선거가 끝나면 돈을 돌려줄 테니 시키는 대로 돈을 송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B 씨는 약속한 대로 A 씨에게 돈을 반환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A 씨는 B 씨의 말에 속아 2016년 3월 보관금 명목으로 5,000만 원을 송금한 것을 비롯, 2018년 4월까지 보관금이나 차용금 명목으로 총 61차례에 걸쳐 총 72억 117만 원을 송금했습니다.


송금 명목은 다양했습니다. B 씨는 A 씨에게 "남편을 위해 미리 기도를 해서 나쁜 액운과 운이 약한 것을 돈으로 대신 막아야 당선이 될 수 있고 선거가 끝나면 돌려주겠다"거나 "합의 이혼을 하는데 돈을 빌려주면 갚겠다" "3일 안에 돈을 송금하고 이유는 묻지 말라. 돈을 보내지 않으면 선거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다"는 등의 핑계로 돈을 송금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TV 촬영에 돈이 필요하다" "할배(신)가 돈을 보내라고 했다" "돈을 입금하면 남편의 구설수와 액운살이 풀어질 것이다" "25일 돈을 입금하면 선거 판세가 확 바뀔 것이다" "선거가 순탄하게 좋은 결과가 나오려면 돈을 보내라" "남편의 운기가 떨어진다. 돈을 송금해야 선거에 도움이 되고, 좋은 기운이 남편에게 가 액살을 막을 수 있다"는 식으로 거액을 뜯어갔습니다.

A 씨로부터 돈을 송금받았을 당시 B 씨는 일부 부동산을 갖고 있었지만, 해당 부동산들에는 모두 부동산 가액 이상의 근저당권이 설정되어 있어 사실상 재산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B 씨는 돈을 송금받은 후 자신의 남편 C 씨 관련 은행계좌로 수일 이내에 그 돈의 대부분을 송금했습니다. 적을 때는 60만 원, 많을 때는 4억 2,000만 원에 이르는 돈을 남편에게 보낸 겁니다.

속았단 사실을 깨달은 A 씨는 B 씨를 고소했고, 서울중앙지법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B 씨에게 징역 7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을 거쳐 올해 3월 1심에서 선고된 형이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 돈 증여받은 무속인 남편 상대로 30억 원 반환 청구

A 씨는 B 씨로부터 돈을 송금받은 C 씨를 상대로 돈을 돌려달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습니다.

우선 A 씨는 "C 씨가 자신의 배우자와 공모해 자신들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을 일거에 해결할 목적으로 B 씨의 무속적 힘을 맹신하고 있는 A 씨 상황을 이용해 72억여 원을 편취했다"며 "C 씨가 B 씨와 공동불법행위책임을 부담하니 30억 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했습니다.

또 A 씨는 손해배상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B 씨와 C 씨 사이에 맺은 증여계약을 취소해달라"는 청구도 함께 냈습니다.

C 씨 측은 "B 씨로부터 돈을 송금받은 계좌는 자신의 누나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금형업체의 운영자금 계좌"라며 "즉 돈은 (C 씨가 아닌) 금형업체 동업조합에 지급된 것이므로, 금형업체 동업자인 C 씨와 C 씨의 누나 모두에게 소송을 내야 하는데 C 씨만을 상대로 낸 소송은 부적법하므로 각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외에도 C 씨는 B 씨가 그 같은 불법행위를 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무속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얻은 수익을 송금하는 것으로 알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법원 "남편-부인 사이 증여계약 취소…남편이 30억 원 돌려줘라"

서울중앙지법 제14민사부(부장판사 김병철)는 A 씨의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습니다. A 씨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C 씨가 B 씨의 사기 범행과 객관적으로 관련해 어떤 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취지였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나 B 씨와 C 씨 사이의 증여계약을 취소하고, 그 돈을 반환하라는 사해행위 취소 청구는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사해행위 취소 청구는 △채권이 있을 것(보전받아야 할 채권의 존재) △사해행위가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요건이 인정돼야 받아들여집니다.

법원은 A 씨에게 채권이 있단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B 씨는 사기 등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A 씨에게 72억여 원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상황에서 편취한 돈을 C 씨에게 증여한 이상, A 씨의 채권이 사해행위 취소 청구에서 보전받아야 할 채권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씨의 사해행위 역시 인정됐습니다. 법원은 "B 씨가 C 씨에게 처음 돈을 증여할 당시인 2016년 5월 이미 A 씨에 대해 2억 1,000만 원 상당의 손해배상채무를 부담하는 반면, 다른 재산이 채무액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채무초과 상태에서 C 씨에게 돈을 증여한 행위는 A 씨를 포함한 일반채권자들에 대한 관계에서 채권자 취소의 대상이 되는 사해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 판례상 이미 자력이 없는 상태의 채무자로부터 증여 등을 받는 사람, 즉 사해행위의 '수익자'는 그 같은 법률행위가 채권자를 해하는 행위란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익자가 재산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선 이 같은 사해행위에 대해 알지 못했단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겁니다.

이 때문에 C 씨는 돈을 송금받을 때 B 씨의 사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역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B 씨는 증여가 채권자들을 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C 씨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고 추정된다"며 "C 씨는 B 씨의 배우자로서 경제생활을 같이 하고 있었던 점, 무속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관계에 있었다고 보이는데, 수십억 원에 이르는 거액을 무속활동으로 벌었다고 단순히 믿었단 점은 경험칙에 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B 씨와 C 씨 부부 사이에 맺어진 증여계약은 취소되어야 하고, C 씨에게 원상회복으로 A 씨에게 30억 원과 지연손해금을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은 쌍방 모두 항소하지 않아 1심에서 확정됐습니다.

백인성 기자 (isbae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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