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목멱칼럼]불륜사건 SNS 조리돌림은 정의일까

입력
기사원문
송길호 기자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박주희 제이 대표변호사]지난 달 초 카카오톡을 통해 ‘○○은행 불륜 사건’이라는 지라시가 나돌았다. 모 은행에 재직 중인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가 같은 은행의 팀장과 불륜 관계였음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지라시에는 당사자 이름과 사진은 물론 서로 주고받은 카카오톡과 문자 대화 내용, 그리고 직책과 지점 정보가 표시된 은행 내부 인트라넷 사진까지 담겨있었고, 뒤이어 포털사이트의 게시판이나 유튜브 등에는 지라시에 나와 있지 않은 출신 학교 같은 신상 정보부터 당사자의 소셜미디어를 캡쳐한 사진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 ‘블라인드’라는 익명 게시판에는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머리채를 잡은 사진과 그를 말리는 남성이 찍힌 사진 한 장과 유명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의 불륜을 안 아내가 회사를 찾아가 불륜 상대방 여자의 머리채를 잡은 것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그리고 곧 이어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과 사진과 직책 같은 신상정보가 정리된 내용이 카카오톡과 게시판 등을 통해 ‘□□전자 불륜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퍼져나갔다. 그 외에도 유튜브에는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했던 여성이 불륜녀의 결혼식장에 찾아가 소동을 부리는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글과 영상은 카카오톡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 나가고,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셀 수 없이 복제되고 재생산되어 전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당사자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차치하고 공인도 아닌 일반인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치부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일을 보며 그 잔인함과 폭력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도 ‘이 사건 당사자들이 앞으로 한국에서 살 수 있겠느냐’는 걱정을 빙자한 조롱 댓글이 달릴 만큼 이렇게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단두대에서 목을 자르는 일만이 ‘사형’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에 본인의 민감한 신상정보가 공개되고 끊임없이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당하는 일도 한 사람의 명예와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일이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벌어졌던 공개처형의 21세기 버전인 것이다.

혹자는 다른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고 상처를 준 사람들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잘 사는게 정당한 일이냐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여나 억측이 있을까 덧붙이자면 지라시 속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행동이 옳다거나 불륜을 옹호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대중들에게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있느냐는 이야기이다. 배우자들이 사적 보복이라는 측면에서 불륜 폭로 글을 올리는 행위도 충분히 형법상 문제될 수 있는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간통죄도 폐지되고, 상간자들에 대한 위자료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당사자들의 행동은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당사자도 아님에도 대중이 불륜남녀를 공적으로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신상을 파헤치고 조리돌림을 하는 게 과연 법치주의 사회에서 합당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대중이 무분별하게 지라시를 퍼트리고 개인 정보를 캐내는 행동이 정말 ‘정의’를 위한 것인지도 묻고 싶다. 겉으로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질타하고 상처 입은 배우자를 위하는 일로 포장하지만 그 기저에는 원초적인 흥미나 오락을 위한 욕구가 깔려 있는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폭로 글이 올라오면 ‘팝콘각’(재미있는 일을 팝콘을 먹으며 구경한다는 인터넷 신조어)이라며 사건에 대한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댓글도 달린다.

기본권이 발달하면서 갈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중히 여겨지는데 역설적이게도 한쪽에서는 일반인의 사생활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비난을 받는다. 사생활의 자유를 이유로 간통죄를 폐지한 헌법재판소도 국가의 형벌권이 아닌 군중에 의한 정죄가 이루어질 것을, 그리고 그 형태가 더 잔인하고 폭력적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의 밀실에 대한 관음증적 관심은 애써 거둘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관련된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수 있도록 두자는 이야기이다. 물론 상간자에 대한 위자료가 현실성 없다는 비판이나 공적 구제에 대한 불신 역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교수대에서 범죄자가 처형당하는 걸 보면서 군중이 즐거워하던 중세시대의 관습이 문명사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오피니언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