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중심’ 강간죄 개정, 유죄추정·무고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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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중심’ 강간죄 개정, 유죄추정·무고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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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 정도 따지는 ‘피해자 재판’
법률전문가도 폭행·협박 판단 모호
2018년 성인지감수성 판결 이후도
성폭력범죄 무죄율은 여전히 높아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성폭력 본질
강간죄 핵심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
우리나라도 법 개정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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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24일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참여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조두순 출소 논란에서 보듯 한국 사회는 성폭력에 강경 대응하는 것 같지만 정작 성폭력 문제의 본질에는 큰 관심이 없다. 법원에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 구성요건은 ‘폭행과 협박’으로 굳건하다. 문제를 밝혀 해법을 찾고자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의 연속 기고를 마지막으로 싣는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폭행·협박이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필요한데, 이것이 그 유명한 ‘최협의설’ 기준이다. 개념정의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 사건에서의 판단은 굉장히 어렵다. 다음 중 최협의의 폭행·협박으로 인정된 사례는 몇 개나 될까?
 

‘최협의설’ 우선, 동의 여부는 뒷전



①피해자를 세게 끌어안은 채 가슴으로 피해자의 등을 세게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②피해자를 갑자기 양손으로 껴안아 눕힌 다음 주먹으로 얼굴을 한 차례 세게 때렸다

③성관계 사실을 동네 사람들과 남편에게 폭로하겠다고 했다

④피해자를 끌고 가 쓰러뜨리고 목을 누르면서 ‘소리를 지르면 칼을 가져와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⑤피해자를 무릎 위에 마주보게 앉힌 후 양손으로 피해자의 양팔을 강하게 잡았다

⑥승용차 안에서 손과 몸으로 피해자의 몸을 누르고 옷을 벗겼다.

법원은 ①⑤⑥을 최협의의 폭행·협박으로 인정했고, ②③④는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가 아니라고 봤다. 장담하건대 관련 판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법률 전문가여도 정답을 맞히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 판단 과정에서는 앞에서 제시한 내용과 함께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만, 폭행·협박의 정도에 대한 판단도 쉽지 않다. 이런 사건에서는 정확한 개념 정의와 판단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짚어봐야 한다. 다시 한번 살펴보면, 최협의의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의미한다. 판단기준이 ‘피해자의 반항’을 중심으로 설정돼 있다. 현실에서의 어떤 행위가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인지 분류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피해자가 반항을 격렬하게 했는지, 그럼에도 반항이 제압돼 피해를 입었는지 살펴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 않았다면? 무죄다. 최협의설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과거의 정조 관념과 같이 피해자에게 목숨을 건 반항을 요구한다는 비판,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재판이 아닌 피해자가 얼마나 반항했는지로 결정되는 피해자 재판으로 진행된다는 비판 등이 그것이다. 법원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종합적인 판단기준도 적용하고,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폭행·협박에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전향적인 판결들을 내리고는 있으나(대법원 20053071), 여전히 최협의설은 유지되고 있으며 판단기준의 핵심이 ‘피해자의 반항’과 연결돼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처벌하는 쪽으로 법률을 개정하자는 요구는 성폭력의 정의와 판단기준을 성폭력의 본질에 부합시키자는 취지다. 성폭력의 본질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에 있고, 이는 결국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귀결된다. 그런데 최협의설이 적용되는 현재의 성폭력 법제에서는 피해자의 의사가 성폭력 판단과 무관한 부수적 사정으로 밀려날 수 있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고 강제력이 행사된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 정도가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항과 폭력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행 법제는 자신의 피해가 성폭력인지 아닌지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피해자가 신고를 주저하게 할 수도 있고 나아가 ‘상당히 심하게 때리거나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해자의 의사를 다소 무시하고 성관계를 하더라도 괜찮다’는 잘못된 인식이 통용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의를 중심으로 한 강간죄 개정 요구는 단순히 처벌 범위를 넓히자는 구호를 넘어, 성폭력에 대한 기본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본질에 관한 주장이다.

동의를 성폭력 판단기준의 중심에 놓더라도 폭행·협박·위력과 같은 강제적인 요소들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동의의 존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 다만, 현재와 같이 강제력의 정도에 대한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서 어딘가에 선을 그어두고 그 선을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와 같은 비본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성폭력의 유무죄가 갈리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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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12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비동의강간죄’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 발의를 하기 전에 붙인 대자보. 류 의원은 그달 10일 국회 의원회관 곳곳에 노란색 대자보 100장을 붙여 눈길을 끌었다. 류호정 의원실 제공
 

성폭력 무죄율, 일반범죄의 2배



대법원에서 성폭력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성인지감수성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결이 나온 이후,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뒤집힌 유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성인지감수성 판결이 나오고 미투 운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던 2018년 이후 기간만 살펴보더라도, 성폭력 사건은 여전히 유죄를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강간 사건에 대한 검찰의 혐의없음 처분율은 2018~2019년 평균 47.85%로서, 일반 형사범에 대한 혐의없음 처분율 22.65%보다 훨씬 높다(대검찰청 범죄분석). 법원에서의 제1심 무죄율을 보더라도 강간과 추행의 죄의 무죄율은 2018~2019년 평균 3.85%로서, 일반 형사범에 대한 무죄율 2.6%보다 높다(대법원 법원행정처 사법연감). 무죄율의 경우 전반적으로 매우 낮은 상황이기 때문에 차이가 크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일반 형사범보다 강간과 추행의 죄의 경우 무죄를 받을 확률이 48%가량 높은 것이며,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성인지감수성 판결과 미투 운동 전후를 비교하더라도 강간과 추행의 죄의 무죄율이 일반 형사범보다 더 큰 폭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2017년 3.49%→2019년 4.02%, 일반 형사범은 2017년 2.5%→2019년 2.53%). 몇몇 뉴스에서 문제 된 사건들만 주로 접하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과는 현저히 상황이 다른 것이다.

강간죄의 판단기준을 동의를 중심으로 개정한다고 하여,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유죄가 인정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점은 여전히 검사가 증명해야 하고, 피고인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며, 동의의 존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행위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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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죄 처벌 5.9%…94%는 ‘2차 피해’



비슷한 취지에서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강간죄 개정을 하면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 역시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강간죄가 개정될 경우 폭행·협박 여부는 다툴 필요도 없이 ‘동의가 없었다’는 주장만 해도 되니까 무고가 더 용이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동의 없는 성관계에서 왜 강제력이 없었는지 △왜 저항을 시도조차 못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실제로 피해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맥락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무고를 하려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차피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서 복잡한 맥락을 설명하기보다는 가해자가 때렸다거나 강제로 몸을 누르고 옷을 벗겼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고 사건은 주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피해자를 역고소해 수사가 진행된다. 애초 성폭력범죄의 경우 성폭력 피해를 가짜로 꾸며내는 무고를 많이 할 것이라는 통념 자체가 통계로 뒷받침되지 않은 내용이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를 보더라도 2017~2018년 전체 성폭력범죄 처분 인원은 8만677명인데, 같은 기간 중 무고로 유죄가 선고된 인원은 341명(0.42%)에 그친다. 성폭력 사건 중 무고의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범죄 혐의자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을 무고로 고소한 사건 중 5.9%만이 유죄가 선고됐고 나머지 94.1%는 처벌되지 않았다. 성폭력범죄를 저지르고도 피해자에게 무고의 혐의까지 덧씌워 2차 피해를 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성폭력범죄의 무고가 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무고죄로 처벌될 가능성 외에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잣대, 낙인, 2차 피해 등 무고가 쉽지 않도록 하는 이중의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폭력 무고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무고의 문제가 있더라도 이는 처벌을 강화하는 등 무고 그 자체에 대한 해법으로 접근해야 하지, 동의 여부에 기반한 강간죄의 도입을 전면 반대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유엔 여성지위향상국(DAW)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강간죄를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개정할 것을 권고했고, 유럽연합 또한 이스탄불 협약을 통해 동의 없는 성적 행위를 강간 등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입법적 조처를 취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영국·독일·스웨덴·벨기에·오스트리아 등이 법을 개정했고, 비유럽 국가 중에는 미국의 일부 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동의 기준의 강간죄를 규정하고 있다.

외국의 법률을 모방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여러 국제기구가 일관되게 동의 기준에 기반한 강간죄 개정을 권고·촉구하고, 실제로 여러 나라들이 법을 개정·시행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규정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며 올바른 방향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 성폭력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피해자 동의를 어떻게 파악하고 존중할 것인지에 맞춰야 할 때이다.

이경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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